내친구
junsway
2004.07.10 20:30:21
1. 뒤를 잡다가 길을 잃다.
석달 전에 핸드폰을 바꾸기 전까지 핸드폰을 7년이나 계속 썼다. 워낙 고물이기도 하고 밧데리도 하나고 이젠
그마저도 수명이 다해 한나절을 버티기 어려웠다. 가족과 친구들의 집중 공격은 견딜만했지만 결국 핸드폰은
통화대기 1시간도 못버티고 운명하고 말았다. 7년전 핸드폰을 장만했을 때 슬림형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딜가나 꺼내놓으면 화제거리가 되는 그 퇴물. 사람처럼 수명이 다해 죽는 그 모습에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를 위해 이렇게 몸바쳐 사랑할 존재가 그렇게 많을까?
카메라까지 달린 새 핸드폰을 사면서 그만 과거의 핸드폰 안에 들어있는 전화번호부를 옮기지 못하는 실수를
하였다. 안되는 머리로 몇몇의 지인은 기억하지만 약 90명에 해당하는 지인들의 연락처를 잃어버린 것이다.
오래된 수첩을 뒤지고, 책상에 짱박힌 명합첩들을 뒤적여서 한 20명 정도는 복구했는데 아직도 80명 정도의
지인은 내게 전화가 오길 기다리는 형국이다.
살다 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힘든게 사람관리다. 그중에 꽤 친하다는 친구들도 10여명 있지만 이 녀석들도
때마다 무슨 경조사에 챙기기 힘들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난 영업형 인간도 아니고...... 때론 한 몇년 잊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만나도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서로 먹고 사느냐고 바뻐 만나기도 수월찮은데 뭐.......
매번 사람관리 해야지 해야지 하며 뒤를 잡다가 결국 길을 잃어버린 꼴세다.
2. 결혼 그리고 출산.
결혼하고 엄마가 아닌 또 하나의 여자에게 매이다 보니까 사는 게 장난이 아니다. 돈 벌어주랴, 눈치보랴.....
그러다 보니 일년이 눈 깜짝할새에 가더라. 거기다 임신해서 열흘전에 애까지 낳으니까 정말 이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는데......
이러고도 영화를 계속 해야하는 것인지.....
불가능한 게 아닌가 몇번이나 곱씹어 본다.
과거 모 감독이 조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하니 나오라고 하니까.....
마누라가 돈벌러 가서 애봐야 한다며 못나온다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제는 내 차례다.
영화한다고 이리 저리 어울리고 술도 진탕 먹고 영화도 만들고, 이상한 곳에서 영화 관련된 여러일도 하면서
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 내가 정말 재능이 있을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딜레마에 시달려야 했다.
밥이야 여기 저기서 얻어 먹으면 되고 목숨이야 연명하겠지만 내 영혼의 삶을 정말 지속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나를 평생 괴롭힐 것이다. 결혼한 사람으로서 그렇지 않은 영화동료들에게 분명히 하나 말해주고
싶은 것은 영화를 하려면 반드시 결혼을 해보라는 것이다. 특히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은........
지옥을 맛볼 것이고... 그 안에 다시 천국이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내친구.
영화 '트루로맨스'를 보면 오프닝에 크리스챤 슬레이터가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강한 호감과 그리움을 내뱉느 대사
가 나온다. 뒤에 슬레이터가 영화안에서 어려울 때마다 환상처럼 뒤에 나타나 슬레이터에게 힘을 주는 엘비스.
난 가끔 시나리오 작가가 된 것을 하늘에 감사할 때가 정말 많이 있다. 나도 슬레이터처럼 내친구가 있다.
그러나 난 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백 수천명의 인간들이다. 만신을 몸에 품은 무당과 같다고 할까? 그들과
나는 끊임없이 대화한다. 그중엔 꽤나 불친절하고 무례한 놈들도 있고, 상당히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간들도 있다.
그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시간은 정말 빨리도 간다. 그들은 보이지 않지만 살아 있고 역동적이고 에너지 그 자체다.
그들이 있기에 난 모든 것을 이겨낼 수가 있다.
삶이 고단하고 인생의 의미가 없다면 난 작가가 되보라고 권하고 싶다. 학원에 가서 작법을 배우고, 전형화된
인간을 그리는 그런 인간이 아닌.... 정말 영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작가.....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004, 7, 10
취생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