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vincent
2003.12.10 05:51:48
대학 1학년 때...
농활을 갔다오던 길이었다.
함께 농활을 갔던 다른 학교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평소에도 눈을 크게 뜨고 까르르 까르르 웃어가며
세상의 모든 심각한 일들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심각한 말을 내어뱉는 사람들 비웃는 것처럼
뛰어다니던 그녀는
그 날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어느 상점의 유리창을 혼자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부르자 또 까르르 까르르 웃어댔다.
그녀의 동갑 남자친구는 이제 곧 군대를 가야한다고 했다.
그는 우는데 그녀는 웃었다.
신입생 시절이 거의 다 지날 무렵...
내가 처음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을 때
그녀는 날 부축해서는 그 먼길을 몇 번을 함께 차를 바꿔타면서
우리집에 함께 왔다.
그녀는 학교와 너무 멀었던 우리집에 온, 첫번째 동창이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식은 김밥과 따뜻한 미역국을 나눠 먹으며
함께 낄낄거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언니..."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몰라"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자주 했던 말은 "몰라"였다.
그녀가 졸업할 때 우리는 이제 동아리방이 심심해질 거라고
그러니 자주 오라고, 그랬더랬다.
"나 없으면 니네들 정말 심심하겠다. 내가 여기로 출퇴근할까?"
그리고 또 까르르 까르르 웃어댔다.
그녀는 은행원이 되었다.
그녀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토요일, 이른 시간 퇴근해서 달려갔는데
벌써 피로연이었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신랑 신부 친구들이 모두 친한 피로연장은 격의 없고 화기애애했다.
신부는, 주는 술을 모두 받아마셨고
어울리지 않게 "소양강처녀"를 박수치며 씩씩하게 불러 제꼈다.
모두 이런 신부는 처음 본다고 낄낄거렸다.
연말이면, 그녀는 빼놓지 않고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왔다.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나에게 세상을 왜 그렇게 심심하게 사냐고 그녀식으로 충고를 해보냈다.
언제나 즐거워 어쩔줄 모르겠다며 즐거움을 나눠주고 싶어서 어쩔줄 모르겠다며...
나는, 즐거운 그녀가 부담스러워서
오는 전화만 짧게 받곤 했다.
그녀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녀의 들 뜬 목소리를 그냥 들어주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에게선 뜬금 없이 엽서가 오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산 엽서였다. 혼자서 여행을 다녀왔다는 내용이었다.
가끔 휴일에 전화가 왔다.
남편은 안들어오고 심심해서 그냥 전화했다며
"너는 왜 결혼을 안하니. 얼마나 재밌는데..."
까르르 까르르 웃어가며
그녀에게 자주 전화가 왔다.
나는 늘 핑계를 대며 만날 날을 미루곤 했다.
그러다... 그녀가 이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늘 너무 즐거웠던 그녀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그제서야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즐겁게 하소연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승진하지 못했던 그녀는 직장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소연이 끝나자 다른 남자와 약속이 잡혔는지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고 웬지 소모된 필터같은 느낌이 되어버린 나는
무거운 발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그녀의 문자 메시지가 자주 들어왔다.
나 여전히 즐거워, 나 여전히 행복해.
뭔가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그녀는
그렇게... 내가 답장을 보내던가 말던가
혼잣말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군가 말할 사람이 필요했고
때마침 그 때 내가 연락이 되었고
다행히 대꾸 없이 말을 들어주는 성격이어서...
그래서 선택되어 독백같은 메시지를 자주 받던 나는...
그런 사람이 여럿 있었던 나는...
그 여럿 중에 한 사람으로 그녀를 등록시켰다.
처음엔 답을 보내다
나중엔 무시했다.
그러자... 뜸해졌다.
그러다... 더이상 그녀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오지 않게 되었다.
어제 아침,
결혼 후 평소 전혀 연락을 하지 않던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안좋은 소식으로 전화를 하게 돼서..."
말을 채 듣기도 전에
그녀가 떠올랐고, 설마..가 떠올랐다.
중국에 여행을 갔었단다.
이혼 후, 골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고, 그녀가 그랬었다.
중국에 골프를 치러 갔었단다.
숙소에서... 베란다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했다고 그렇게 들었다.
중국에서 화장을 한 후,
들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녀 때문에 모이기로 했다.
그녀가 어쩌다 베란다 난간 위로 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서로 전화를 주고 받으며
서로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그녀의 타전을, 신호를 외면했던
어떤 미안함 같은 것이 우리를 뒤흔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 알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게
꿈 속에서 자꾸 그녀가 또렷하게 떠올랐고
나는 사람들과 자꾸 얘기를 했다.
그러다 다시 전화를 받고 메시지를 받으며
현실에서도 자꾸 얘기를 했다.
그녀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 밖에 있던 대상에 대해서.
평범하게 행복했던, 같은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던 자신의 친구들과
어느새 그녀는 멀어져 있었고
자신의 친구들이자 남편의 친구들이기도 했던 사람들과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외로웠을 것이다.
틀림없이.
알았는데도
늘 즐거웠던 그녀가
사실은 즐거운 척 했던 것 뿐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우리는 부담스러워서 그녀에게 손을 뻗지 못했다.
늘 위태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뿜어내는
이상한 기운,
쉼게 감염되어버릴 것 같은,
내 삶을 흔들어놓을 것 같은 불안한 기운 때문에
어쩌면 애 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오던,
숱하게 지워버린 그녀가 보낸 핸드폰 메시지들이
또렷하게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언젠가처럼 불쑥
"오늘은 요가학원에 등록했어, 부지런해지니까 정말 좋다"면서
불쑥 메시지가 날아올 것 같아서.
그 언젠가.. 나는 보았던 것 같다.
함께 취해, 밤의 거리로 뛰어나왔을 때
아직 어린 그녀가...
상점의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혼자 울고 있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