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탕고

alex182 2003.04.23 02:19:57
친구에게 여행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나
예전에 적어두었던 글을 열어보았습니다.
스크롤 압박 있고요,
누가 이 루비통아가씨 모르시나요?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탕고-


에펠탑 한가운데에 카운트다운이 매겨진 그해 여름
하릴없이 센 강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바게트를 뜯었다.
나는 갈 곳이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유람선 이브 몽땅이 지나가면 일어서서 열렬히 바게트를 흔들었다.

퐁네프에서 미라보까지 걸어간 후 지하철을 타고 한국민박집을 찾았다.
충청도 계곡 어느 엠티촌에 있는 민박집 같은 곳에서 객들과 칼잠을 잤다.
다음날부터 나는 한국식당을 전전하며 그저 일이나 도우며 기숙하기를 청했다.
파리에는 한국식당이 서른개가 조금 넘는다.
대략 이십여개의 식당에서 퇴짜를 맞았다. 어느 곳에서는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고 어느 곳에서는 빨리 서울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십여개 남짓의 한국식당이 남았으나 더 찾아가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네델란드 친구가 말하던 보르도의 포도농장을 무작정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돈은 이백달러가 채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날 밤 민박집의 객들과 싸구려 와인을 들이키다 루비통 아르바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샹제리제 거리 주변을 배회하면 업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다음날 나는 민박집 앞 지하철 말라코프 역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를 비롯한 민박집에서 나온 객들 몇에게 그녀는 루비통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러잖아도 샹제리제 거리로 가려던 우리 셋은 즉석에서 그녀를 따라 지하철을 타고 뛸르리 공원 역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의 보스 즉 업자아저씨를 만나 구입에 대한 노하우를 간단히 주지받고 차로 샹제리제 거리 주변으로 옮겨져 루비통 매장으로 투입되었다.

두개의 매장에서 약 사만프랑 어치를 구입했다. 좋은 걸 많이 사왔다고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업자아저씨는 오십프랑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내 배당금 사백프랑에 오십프랑을 더하니 한국화폐가치로는 대략 9만원, 당시 하루 잘 곳을 찾아 전전하던 나로서는 6일치의 민박집 숙박료를 번 셈이었다. 업자아저씨는 다음날에는 백화점의 루비통 매장을 공략하자고 하며 약속을 잡았다. 나중에 보니 같이 참여했던 두명의 객들은 루비통 백 하나씩만을 사오는 데 그쳤다고 했다.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맥주 열두병 팩을 사들고 민박집에 가서 객들과 한잔 했다. 나의 보르도행은 하루 더 연기된 셈이었다.

다음날 뛸르리 공원에서 다시 그녀와 업자아저씨 그리고 업자아저씨의 중국인 운전사와 만나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녀가 데려 온 얼빵하게 생긴 대학교 일학년 생 정도 되어 보이는 녀석과 함께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러나 백화점은 애시당초 나에게 물건 팔기를 거부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 정도가 너무 완강해 나도 화를 내고 그냥 돌아와보니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와 대삐리에게 말했다. 방금전에 업자아저씨의 차가 강도를 당했다는 것이다. 예전 동업자였다는 터키계 삼인조가 칼로 위협해 업자아저씨와 중국인 운전사를 차에서 내리게 하고 차와 차에 실린 루비통 가방들과 함께 튀었다는 것이다. 아뿔사, 차의 트렁크엔 내 전부인 배낭이 들어있었다. 대삐리 녀석의 표정도 굳어있는 걸 보니 녀석도 무언가 떨궈놓았음이 분명했다. 아저씨는 경찰에 신고하러 갔고 그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뛸르리 공원 앞 차도에 앉아 한숨만 쉬고 있게 되었다.

삼십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는 핸드폰을 받았고, 강도들이 얼마 못 가 순찰차에 잡혔다는 희소식을 알려왔다. 그러나 경찰서에서는 절차상 강도들이 훔쳤던 차는 기본적인 수사가 끝날때까지 업자아저씨도 만질 수 없다고 했다. 이래서 보르도 행이 하루 또 밀리는 구나, 민박집 숙박료 팔십프랑 추가에...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삐리 녀석은 내일이 귀국인데 차에 자신의 수첩이 있다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말은 안하지만 그녀도 차에 가방을 두고 내린 것으로 보였다.

다시 전화를 건 그녀는 아저씨에게 일단 내 배낭과 대삐리의 수첩만이라도 최대한 빨리 건져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대삐리는 아저씨와의 아니 우리의 짐과의 유일한 연락책인 그녀와 그녀의 핸드폰 주변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매한 상황이었고 짜증나는 무더위였다. 아무생각 없어진 나와 대삐리에게 그녀가 요기라도 하자며 우리를 주변 중국요리 테이크 아웃점으로 데려갔다. 나름대로 곤욕스런 상황에서도 침착한 그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단정한 얼굴에 생머리, 자그맣고 약간 통통한 체구였으며 나팔형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실내가 더웠는지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중국식 볶음밥과 음료수를 사들고 그녀는 우리를 뛸르리 공원으로 데려갔다.

여기저기 그늘에 널린 벤치에 앉아 낯선 세 명의 동업자는 별 말 없이 식사를 마쳤다. 대략의 나이를 가정해보건데 그녀와 나는 비슷한 연배였고 대삐리 녀석은 대학 신입생 정도 되어보였다. 녀석은 오늘이 출국 하루전인데 이일로 인해 마지막날 관광이 허사로 돌아갔다며 볼맨 소리를 늘어놓다가 그늘에서 잠들었다. 아버지가 표를 준비해줘서 아무 생각없이 유럽여행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뭐 별로 바랄 건 없지만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루비통 아르바이트도 이 일로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올 여름 한 철 소개받은 업자아저씨의 일을 도와주었는데 여름도 이제 다 끝나가고 좀 더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전공은 무엇이며 파리에는 얼마나 있었고 혹시 댁의 일자리를 구하는 와중에 나에게도 떨어질 수 있는 일자리는 없는지까지 뻔뻔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프랑스에 온 지 일년이 좀 넘었고 어학을 마치고 파리에 입성한 지는 채 삼개월이 안 되었으며 미술을 전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그녀 코가 석자였다. 그리고 나는 불어를 못하므로 가뜩이나 구하기는 힘들것이고 보르도의 포도농장은 예전에 같이 어학을 듣던 세네갈 친구들이 다녀왔다는데 무지 고된 일이어서 추천하기가 그렇다고 했다. 물론 그녀가 아는 루트도 없을뿐더러...

아무튼 일자리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팔개월째 지속중인 객지생활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여력이 닿는대로 계속 파리에 남아 있을거라고 말했다. 그녀도 동경을 가지고 온 프랑스 생활에 조금은 지쳐있는 듯 했다. 자기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프랑스는, 파리는 더 이상 객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조금 아끼는 편이었으나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파리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날아온 자그마한 한국여자, 루비통 아르바이트, 어찌보면 삐끼같다고도 느껴지는 그 일을 한여름 지속하면서 싼 다락방을 구하겠다던 생활력을 피력하던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애처롭게도 느껴졌다. 그녀도 대책없는 여행을 구가하는 시꺼먼 피부의 나를 -이집트와 이탈리아에서의 두달은 파리에서 충분히 나를 베트남 사람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애처롭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몇 마디 더 나누다가 둘 다 벤치에 기대 예정되지 않은 시에스타를 청했다.

세시간 정도 지났을까, 오후 4시경, 업자아저씨가 공원으로 내 배낭을 찾아가지고 돌아왔다. 업자아저씨와 중국인 운전수는 그녀와 우리에게 아까의 정신없던 상황을 이야기해주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대삐리의 수첩은 트렁크가 아닌 차 앞 대쉬보드 위에 있어서 꺼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울상인 대삐리에게 동생을 다루듯 친절하게 위로를 해주고 대삐리의 주소를 받아적었다. 한국으로 부쳐주겠다는 말과 함께.

루비통 콤비와 작별을 하고 나와 대삐리는 무작정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녀석과 같이 거기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석은 나에게 친근하게 말하며 이제 자신에게는 필요없는 필름 네 통을 사지 않겠냐고 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린 카메라에 대한 상실감을 떠오르게 했기에 녀석은 나의 불친절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그 녀석 대신 필름 네통 중 두통을 베르사이유 궁전을 오가는 외국관광객에게 대신 팔아주었다. 그리고 하릴없이 분수대 옆에 나란히 앉아 정신없던 하루가 지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그 수첩이 여행일지를 기록한 거여서 자기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녀석이었지만 그때는 조금 기특해 보였다. 적어도 명품을 바리바리 사들고 귀국하는 객들보다는 훨씬. 어두워지기 전 그 녀석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민박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나는 대삐리가 과연 수첩을 한국에서 받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자연스레 그 수첩을 보내준다고 하던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졌다.

그날 밤 민박집에서 뉴욕에서 공부를 하다 유럽에 여행 온 어떤 형님과 친하게 되었다. 그 형님은 두 달 짜리 유로라인 패스가 있었는데 한달이 지난 지금 뉴욕으로 돌아가야 되며 패스를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영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쓰고는 우편으로 민박집으로 부치겠다는 거였다. 패스의 이름은 다르지만 여권과 패스를 한꺼번에 확인하는 꼰꼰한 터미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가 사용할 수 있다는 그 유로라인 패스에 대해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보르도 포도따기 일자리 구하기 프로젝트를 실패한 후 다시 돌아온 일주일 후, 파리 민박집 우체통에서 꺼낸 영국소인의 편지를 꼭 쥐고 있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귀국 비행기표와 이백불이 채 남지 않은 나로서는 한달짜리 패스가 있어도 어차피 유럽여행을 지속하기는 힘들었다. 그래 이걸로 베니스영화제나 다녀 온 뒤에 귀국하리라라고 마음먹고 잠들었다. 그때가 세계가 멸망한다던 99년 9월 9일 경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 재불교민 소식지에 있는 한 식당에 마지막 미련을 가진 채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이었는데 주인아저씨는 혼쾌히 가게에 와서 먹고자며 일을 도우라고 했다. 나는 베니스에 가기 싫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파리에 더 남아있기를 열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식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자연히 유로라인 패스는 쓸모가 없어졌다. 그때 여행이 가고 싶다고 말하던 루비통 아르바이트 걸, 그녀가 생각났다.

노트 한켠에 적힌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먼저 그녀는 취직(?)을 축하해주었고 우리는 약속을 잡았다. 뛸르리 공원 따박 앞에서 만난 그녀에게 나는 패스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과정은 왠지 모르게 사무적이었다. 충분히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역무원이 표에 체크를 하고 돌려주듯 그녀에게 패스를 건넸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녀도 나도 바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식당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빨리 여행을 가야겠다며 제 갈길을 갔다.

그 식당에서는 한달 반 정도 지냈다. 서바이벌 불어로 서빙을 보았으며 낮의 쉬는 시간에는 파리 구석구석을 걸어서 돌아다녔다. 식당 주인아저씨가 교민 중 원로측에 드는 관계로 나이드신 교민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식당에 많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시금치나물에 와인을 마시기도 했고 장봉(프랑스 햄)에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나는 파리한인 침례교회에 나갔다. 거기서 만난 한국청년들, 그들의 의례적인 호의가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들 유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다시 그녀가 생각났다.

전화를 했다. 그녀는 베를린에 잘 다녀왔고 나에게 연락처가 없어서 고맙다는 말을 따로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돌아올 때는 여권과 패스를 대조하길래 따로 표를 구입해야 했다고 말했고 그게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역시 한국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새로 다락방을 구했다고 했다. 나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한번 보자는 말로 전화를 마쳤다.

날이 더 추워지기전에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한달 반 가량 일한 식당. 소중한 시간이었고 고마운 분들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천이백프랑정도 하는 유로라인 패스 한달권을 끈어주셨고 주인아주머니는 따로 이백달러를 찔러주셨다. 이미 나는 팁으로 받은 천오백프랑정도가 있었으니 가난하나마 한달간의 여행은 가능한 지경이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그녀를 만났다. 나는 벼룩시장에서 산 가죽잠바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옷 역시 두터웠던 걸로 기억한다. 가을이 한참 지나고 있었다. 그녀를 계절이 바뀌고도 다시 만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었는데, 우리는 다시 뛸르리 공원에서 만나 베르사이유를 지나 오페라까지 무작정 같이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팔짱이라도 끼면 폼 났을텐데 아직까지 그럴사이는 분명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나나 그녀나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페라 뒤편 거리의 어느 카페에 들어가 나는 맥주를 그녀는 맥주가 아닌 다른 어떤 음료를 시켰다. 이후 맥주를 한 컵 더 추가해 마실 때까지 약 한시간 정도 그녀와 이전보다는 훨씬 여유있게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대학에서 어학관련 학과를 다니다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 문화강좌등을 다녀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의 교육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여기로 그림을 배우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별 다른 걸 가르치냐는 약간 가시섞인 나의 질문에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며 조금 발끈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하녀방으로 통하는 다락방에서의 생활, 부모님이 파리에 놀러 오실거라는 이야기, 여기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포부 등등이 이어졌다. 나 역시 이제 시작될 한달간의 버스여행이 끝나면 귀국하겠지만 다음에 언제라도 다시 공부하러 이곳에 오고싶다고 말했다. 하고싶은 공부는 포도주를 감별하는 기술 혹은 영화를 만드는 기술 아니면 바게트를 굽는 기술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대뜸 물었다, 그때 그 대삐리 녀석 수첩은 찾았는지를, 그녀는 수첩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부쳐주지도 못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때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며 킥킥거렸다.

거리로 나왔을 때 맥주 두 잔 밖에 안 마신 나는 약간의 취기를 느꼈다. 그녀가 탈 버스가 오는 정류장까지 같이 더 걸어갔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우리는 악수를 나눴다. 그녀는 좋은 여행이 되라고 빌어주었고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오면 전화하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버스를 타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가며 생각해보니 우리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에겐 파리에서의 시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기약없는 여행 중 마주친 사람들 사이에 종종 볼 수 있는 무심함이기도 했다.

한 달간의 유럽버스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슈퍼에 들러 남은 프랑을 뒤져 바게트와 싸구려 햄, 그리고 막포도주를 사서 몽마르트 언덕의 샤크 쾨르 성당 앞으로 갔다. 거기서 파리의 전경을 조망하며 영국에서 굶은 배를 채우고 내가 여행했던 날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 가 식당에 가서 일주일 정도 머무른 후 파리발 서울행 에어프랑스에 탑승했다. 그녀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귀국을 앞두고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들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뒷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로부터 이년 반이 지난 지금,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아직도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그녀도 루비통 백의 그 유치한 문양을 볼 때 나를 떠올리는 건 아닐까? ‘푸훗’ 웃음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그녀를 찾아볼 방도는 없다. 이년 반 전의 핸드폰 번호를 지금 서울에서 때리기는 죽어도 싫다. 그 번호가 아직까지 살아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러고나면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녀가 그림을 전공하는 한국유학생 중 하나라는 점 뿐 이지만 그것도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림을 때려치우고 귀국했을 수도 있고 프랑스 남자와 눈이 맞아 마르세유에서 혼혈아를 키우고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나는 그녀의 이름과 나이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다시 만나도 얼굴을 정확히 기억할지 의문이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다. 내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모를 것이다. 그것이 위대한 영화의 제목을 엉터리로 차용한 이유임을 마지막으로 밝혀둔다.

au revior
al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