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야구'로부터

image220 2003.02.08 12:56:23

저는 천성이 몸 움직이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스포츠랑은 소원합니다만,
어디서 야구 이야기를 읽었더니 떠오르는 일들이 있네요.

83년, 국민학교 1학년 때.
그때는 할아버지댁에서 같이 살았었는데
세들어 사는 집에 아들이 둘이었어요.
큰아들 이름이 '시백'이었다는 것이 생각납니다.

근데 그 형들이 만화를 좋아해서
방에 <보물섬>,<소년중앙>은 물론, 고유성, 윤승운, 김형배 작가 단행본 등등이 산처럼 쌓여있었죠.
(하긴 옛날 <보물섬> 두께면 산을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군요.)

사실 저는 시백이 형제랑은 별로 안친했고
제가 할머니한테 만화책 보고 싶다고 조르면
할머니가 시백이 엄마로부터 몇권씩 빌려오는 식이었죠.
일종의 집주인-세입자 간 권력관계였는지.

그 해 여름방학인가도 빌려온 만화책을 쌓아놓고 야금야금 탐독하고 있었는데...
그때 <보물섬> 뒤쪽에는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의 주소록도 실려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재밌네요. 팬레터 보낼 주소들... 외국 배우들 주소도 나와있었던 기억인데.

야구를 좋아할 일이 없었으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웬지 울컥하는 마음에 박철순 선수한테 편지를 썼죠.
왜 그랬는지..

인터넷에서 찾은 다음의 박철순 재활일지를 보건대

82년 : 24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 다승, 방어율, 승률 1위로 투수 3관왕
    4월 10일 대 해태전에서부터 9월 18일 대 롯데전까지 161일간 30게임 등판, 22연승
허리부상 : 82년 9월29일 대 삼성전 (대구구장) 척추 디스크진단
재활 : 83년 2월 전지훈련중 재발, 요추부 간판 헤르니아 진단

그런 무렵이었습니다.

편지 내용은 기억이 안납니다.
아마도 어디 한번 답장이 오나 보자, 아님 말구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덟살 짜리가 그런 생각을 했네요.

그런데, 두어달이 지났을 무렵
나름대로 결론을 짓고 편지 보낸 것도 다 까먹고 있을 때 쯤 답장이 왔습니다.

내용은 복사를 한 것이고
겉봉과 편지 위에 'image220 어린이에게' 정도만 손으로 쓴 거였던 기억이네요.
고맙다, 재활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어린이 여러분 항상 저처럼 꿈과 희망을 가지세요, 정도의 내용이었던 듯.
거기에는 복사한 싸인도 두장인가 들어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사인을 복사해서 보낼 정도면 팬레터가 엄청나게 폭주하지 않았나 싶군요.
옆사람들이 그냥 흉내내서 해 보내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저 그 짓 해본 적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왕OO 감독 사인.)
그래도 가짜보단 사본이 낫다는 현명한 판단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네요.
에이전트도 없었겠고, 가족들이 일일이 답장을 해야했을텐데.

아무튼 박철순 선수한테 그 답장을 받은 게 한동안 자랑이었죠.
사실 박철순이 어떤 선순지도 몰랐으면서.
부끄럽습니다.
그 편지와 사인은, 자랑하려고 공책 같은 데 끼워갖고 댕기다가 홀랑 잃어버렸네요.

2학년 때는 전남북 일대에 '해태 타이거즈 훼미리 회원' 가입 열풍이 불었습니다.
84년 여름, 연주 고모 손을 잡고 진북동 해태 대리점에 갔지요.
한쪽에 훼미리 주스 병들이 박스로 쌓여있는 그냥 동네 창고였는데
사무실도 따로 없고, 창고 안에 책상 몇개 놓고
종이에 볼펜으로 써주는 회원증. 제가 받은 인생 최초의 '증'이었어요.
가입비 오천원에 모자, 얇은 잠바, 반팔 캐릭터 티셔츠를 줬죠.
아마 그 다음날부터 꽤 세트로 입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 회원증으로 할인을 받아 야구장에 간 건 1년동안 딱 한 번이었습니다.
역시 저는 까닭없이 열풍에 휘말렸을 뿐이었습니다.
해태 상대팀이 기억이 안나네요.
친구 동훈이랑 아저씨들이 모여있는 외야쪽에 앉았었는데
잘한다 김봉연, 잘한다 김성한 하다가, 잘한다 김대중으로 가는 응원이랑
아저씨들이 외야에 서있는 김평호 선수를 김평호 김평호 하면서 불렀을 때
돌아보며 쓱 웃던 둥실한 얼굴이 기억 나네요.

중학교 갔을 때는
콧수염 김봉연 선수 형이 서중학교에서 지도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열라 무섭다는 소문이 시내 중학생들 사이에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양반이 육손이라, 뺨 맞으면 얼굴에 손가락 여섯 개 자국이 난다고도 했었고.
하하.

밀키스... 밀키스가 열풍이었죠. 그게 84년 롯데 우승이랑도 맞물리는군요.
저희 세대로서는 90년대 초반 주윤발 광고 때문에 절정을 맞았죠.
경쟁사의 왕조현 크리미도 생각납니다. 크리미 좋아좋아 크리미 크리미 띵하오와아.

팔복동에 그 밀키스를 만드는 롯데칠성 공장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코카콜라 보틀링 공장도 있었죠. 호남식품.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제가 '행운'이라는 낱말을 인생 최초로 체감한 것은
1982년 봄 팔복동 그 코카콜라 공장 앞이었습니다.

집에서 먼 작은 유치원에 다녔었는데, 끝나면 선생님이 시내버스를 태워 집에 보냈지요.
그런데 하루는 동네 다와서 샛길로 빠지는 정비공단 행 버스로 잘못타는 바람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중간에 내렸는데,
그것이 코카콜라 공장 앞이었습니다.

봄이 한창이었지요.
철망으로 담을 한 공장 위에 빨간 코카콜라 간판.
안에 들어가면 온갖 마실것들이 그득하리라는 상상.
공단 동네라 다니는 사람들도 없고 인도에 풀도 나있고 민들레도 피었고
기억에, 그날 아스팔트 포장을 하고 있었어요.
뜨끈한 아스팔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고 로드롤러가 큰 바퀴를 굴리고.
나른해하면서 집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는데
빨간 자전거를 탄 친척형을 만났지요.
뒷자리에 앉아 형을 붙잡고 궁뎅이 찧어가면서 집으로 가는 중에
'아, 이런 것을 가리켜 행운이라고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잠이 부족하니 엉망이 되는군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고는 다음에 또 잇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