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경 이야기 (5)

vincent 2002.04.26 07:21:03

예, 제목은 <박순경 이야기>인데
박순경이 이제 등장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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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파출소 순경 박**(예의상 실명을 거론하지 않겠다)입니다.
여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어제 유괴를 당할 뻔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드디어 나의 궁금증을 한 방에 풀어줄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늠름한 정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 박순경은 내 눈엔 거의 '형사 콜롬보'나 다름 없었다.
그가 콜롬보처럼 구겨진 낡은 바바리코트를 입지 않고 성우 '최응찬'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게 오히려 신기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내 기억은 뒤죽박죽이다. 그 때 '형사 콜롬보'가 했었나?)

"괜찮을거야"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내셨던 아빠가 신고를 하셨던 것이다.

이 느닷없는 방문에 우리들 중 누구보다 당황한건 영숙언니였다.
새 원피스의 치수를 재던 행복하고 단순한 순간이 지난 밤의 사건을 전문가(?) 앞에서 다시 설명해야하는 당혹스럽고 복잡한 순간으로 바뀌는 것을 견뎌낸다는게 영숙언니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런데, 신기한건...
지난 밤의 유괴범과의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을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앞뒤가 안맞게 늘어놓던 영숙언니보다 더 버벅댔던 사람은
전문가다운 침착함으로 영숙언니의 비논리적인 증언을 공격해야할 박순경이었다.
박순경은 미스공언니가 내어온 커피를 마시며 영숙언니 대신 미스공언니에게 더 많은 눈길을 보냈고 애석하게도 미스공언니는 박순경이 아니라 열심히 지난 밤의 숨 막히는 일들을 설명하는 영숙언니에게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영숙언니의 말에 의하면 지난 밤에 영숙언니는 나와 동생이 너무 졸라 '묘기대행진' 녹화를 보러 갔는데
동생과 내가 너무 넋을 놓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혼자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집에 왔다가
반찬거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까운 '이수시장'을 놔두고 하필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족히 20분은 넘게 걸리는 멀고 먼 '방림시장'을 갔다는 것이었다.
왜 '방림시장'을 갔냐는 말에 영숙언니는 예전에 우리 작은집에 함께 놀러 갔다가 그 근방인 '방림시장'에서 사먹은 떡볶이가 맛 있었던 기억이 나 떡볶이도 사먹고 장도 볼겸, 그래서 그 먼 걸음을 감수했노라고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영숙언니 캐릭터로 보면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적어도 박순경은 전문가(?)로서 그 부분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우리야 영숙언니가 그간 한짓을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 있지만
박순경은 '묘기대행진'을 보다 말고 애들까지 두고 급하게 저녁상을 차리러 왔던 사람이 장을 보러 그렇게 먼 곳을 갈 수 있는건지 영숙언니에게 확인받아야했으며
평소에도 영숙언니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저녁상을 차리려고 했었는지 우리에게 탐문했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영숙언니의 말을 고개를 까딱거리며 듣고 뭔가를 적더니(뭘 적나 봤어야했다) 커피가 맛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일과는 전혀 상관 없는 여자들 투피스 한 벌을 맞추는데 얼마냐고 묻고는 급기야 원피스와 바지와 스커트의 가격까지 물어보았다.
엄마가 애인 맞춰줄거냐고 묻자 너무나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아니라고 대답을 해서 그제서야 박순경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나간 후 영숙언니는 의자에 풀썩 주저 앉았다.
엄마는 영숙언니가 힘든 일을 다시 떠올리게 돼서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하셨다.
그리고, 혼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가라고 당부하셨다. 엄마의 당부가 어찌나 절절했던지 영숙언니의 손을 꼭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집에 갔다.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뒤로 박순경은 틈만 나면 의상실에 왔다.
내가 의상실에 갔을 때도 자주 봤고 내가 집에 있을 때도 영숙언니가 갑자기 집으로 뛰어들어오는 일이 잦았던 걸로 봐서 박순경이 의상실에 거의 매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급기야 박순경은 우리 아버지랑도 친해져서 술병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고 동생과 나에게도 사복 입은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친근하게 굴었다.
어느새 영숙언니도 박순경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아저씨'라 부르며 가깝게 대했는데 자기는 제복 입은 남자가 좋다며 박순경을 마음에 두고 자기 딴엔 은근한 방식으로 내게 알려왔다.
물론, 그 때 우리 주위에 제복을 입은 남자는 눈을 씻고 봐도 박순경 밖에 없었다.

불쌍한 영숙언니! 영숙언니에게 더이상 들을 말이 없자 박순경은 영숙언니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영숙언니가 엄마가 맞춰준 퍼프 소매 원피스를 입고 박순경이 오기를 기다렸건만 박순경은 새침하게 인사만 하고 미싱사로서의 자기 업무에 충실한 미스공언니에게만 눈길을 줄 뿐이었다.
영숙언니가 <고양이를 부탁해>의 이요원처럼 새 원피스를 입고 빙글 돌며 나에게 예쁘냐고 묻기에 언니가 안쓰러워 예쁘다고 해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는 내가 부러워서 그러는줄로 오해하시고 내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던 퍼프 소매 원피스를, 그것도 영숙언니 것과 똑같은 걸로 만들어주셨다.
그걸 입고 학교에 가야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다.

그 이상한 삼각관계의 틀이 지속되던 어느 날, 늘 하얀 옷만 입고 다니던 미스공언니가 아주 희안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초록색 니트 상의와 짧은 청 스커트, 굵은 올로 뜨게질 된 아이보리색 모자에, 그 때 당시 내게 너무 충격적이었던 검정 스타킹에 하얀 BB화를 신고 모두를 놀라게 한 그 날, 미스공 언니는 그 날 따라 굉장히 들 떠 보였고, 일찍 퇴근했다.
영숙언니가 어디 가냐고 물어도 웃기만 했고, 내가 소리 내어 묻는 대신 눈빛에 의문을 가득 담아 쳐다보아도 그냥 웃어주기만 했다.
영숙언니에게 말하지 않는건 이해가 됐지만 일기장도 보여주었던 내게도 말하지 않는건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다음날. 내 의문은 자연스레 풀렸다.
여느 날처럼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 미스공언니가 엄마와 영숙언니가 없는 새에 내게만 들어보라고 의상실에 있는 작은 카세트에 테잎 하나를 걸어주었다.
언니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연신 키득대다가 고개까지 파묻고 웃고 있었다.
뭔가를 녹음했는지 일상적인 소음이 좀 들리다가는 목소리를 고르는 남자의 헛기침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윽고 남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 가사를 지금도 기억한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놀라워하고 있다)
가사를 소개하겠다. 누군가 이 의미를 해석하려 시도할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절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월동세기 뒤숭숭 왕왕중제기 소꼬속에 하옥폭폭 우자나솥에썽
거기 아신동 되게 나폴리움 W 씨저탄모금
sing sing sing sing 송징소방 우장송 월동세기 되는데
보신동 아신동 시고다리 바고다리 중계중 성징 보신동 해찌해찔레
띠뜨라 바뜨라 씨요 씨요 미나미나 파미요 거기 하나 지요 강가라잣
강가라잣짜 강가라잣짜 나떼 쁘라이요 hey!!"

(처음부터 이 황당무계한 가사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아채는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미스공언니는 내게 들려주고 나서도 혼자 웃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도대체 이게 어느 나라 말일까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도대체 왜 미스공언니가 이 테잎을 내게 들려주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박순경에게 그렇게 마음이 없는 척 굴던 미스공언니가 전날 그 희안한 옷차림을 하고 조퇴를 한 후 이 테잎을 갖고 와 내게 들려주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는 뒤로 호박씨를 까도 한 상자는 깐 것이었다.

부주의하게도 미스공언니는 이 테잎을 카세트에 꽂아둔 채 집에 갔고 그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었는지 궁금해 미치겠었던 나는 몰래 테잎을 집으로 가져가 동생과 둘이서만 듣고 의논을 해가면서 가사를 받아적었다. (저 가사는 그래서 문자화 될 수 있었다)
박순경이 이 노래 가사에 뭔가 미스공언니에게 전달해주려고 했던 메세지를 암호화해서 숨겨놓았을 것이다, 라는게 내 해석이었고 동생은 내가 "앞으로 좀만 돌려"라고 하면 테잎을 리와인드시키는 역할을 만족스럽게 수행해주었다.

가사를 모두 적은 후 내가 가사를 보고 한 번 따라 부른 후 동생이 따라 불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적어놓고 나니 가사가 금방 외워져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적은 것을 안보고 불러보았고 이렇게 복잡한 가사를 소화해낸 우리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 노래가 '일본 노래'라고 단정지었다. 별 근거는 없고, 그냥 풍-이 그랬다. 아버지가 갖고 계신 일본 노래 테잎이 몇 개 있었는데 듣기에 비슷했다.
동생은 자신이 일본 노래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바로 이 일 때문에 박순경과 미스공언니의 사이가  '봄날'에서 '겨울날'로 직행하게 될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