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purnnaru
2001.12.20 09:58:22
혼자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살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
다큐멘터리로 풀어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2년이 흘렀습니다
적금을 해약하고 부모님의 도움까지 받아 디지털 캠코더 한 대를 사서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 촬영을 시작 한지 1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여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대학 4학년짜리 친구 하나를 만나
조연출이랍시고 명함 하나 파주고 끌고 다닌 지 6개월째로 접어듭니다
그 사이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비디오저널리스트과정을 듣고
영화에 관한 강의도 듣고
테레비젼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들을 녹화하고
숱한 영화제들을 쫓아다니며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어떻게 해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잠 못 이루고 고민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랑 조연출 친구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차비 걱정 밥값걱정 안하고 지낼 수 있을까
몸으로 때우는 헐값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사무실을 마련하겠다고 없는 돈에 멋진 트라이포드도 사고
컴퓨터와 프린터와 편집장비를 구입하기 시작한 지금
결혼해서 몇 년만에 새 집을 장만한 부부처럼 들떠 있는 나를 봅니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날이 다가옵니다
외롭다고 외롭다고
애 하나만 낳아주고 일하면 안되냐고
내 하나뿐인 곰돌이 신랑이 가끔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그만두라고 그만두라고
곱게 살림이나 하면서 시부모나 잘 모시라고
날 낳으시고 기르신 친정 부모님들의 성화를 미소로 버티기도 하고
쉬어가며 하라고 밥이나 챙겨 먹냐고
멀리서 전화걸어주는 친구들에게 걱정말라며 큰소리 치기도 하고
달마다 돌아오는 제사에 집안행사에
며느리 덕도 못보고 늙은 몸을 지치도록 움직여야 하는 시어머님앞에서
밤늦게 허겁지겁 음식준비를 돕다가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고
졸업논문에 기말고사에 치여
작업도 제대로 돕지 못하고 졸업도 안될거 같다고
고민이 많은 조연출에게 네가 있어서 힘이 된다며 어깨 두드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갑니다
모처럼 조연출이랑 단 둘이 만나 술을 진탕 마셨습니다
- 아무 것도 해놓은 게 없는 거 같아요
잘하고 싶은데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 이녀석아, 그래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고선 둘이 핑그르르 도는 눈물을 감추려고
원샷, 원샷을 외칩니다
만나면 할 말도 많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고
수시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다 보니
11살 어린 그 녀석과 저는 이제 친구가 되어갑니다
작업은 아직도 첩첩산중, 가야할 길이 멀지만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석을 만난 것이 올해 최대의 선물인 거 같습니다
나도 그녀석에게 좋은 선물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새해가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