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전차단기
vincent
2001.12.08 03:24:28
새벽에, <도브>를 막 데크에서 뽑고
영화속 주인공들처럼 심란해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려는데
전기가 나갔다.
누전이었다.
차단기를 살펴보니 한 번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냉장고도, 보일러도 모두 나갔다.
내 심란함이 지나쳤을지도 몰라, 웃음이 나왔다.
새벽 기도를 가시려고 막 일어나셨던 어머니께서 놀라셨다.
오늘은 굉장히 춥다는데 큰 일이다.
아버지는 찬 물에 세수를 하시고 차가워진 밥 대신
라면을 드시고 출근하셨다.
아, 까스렌지의 고마움, 너마저 없었다면.
몇 번을 다시 시도해봤지만 점심 시간이 되도록 차단기는
올라갈 줄 몰랐다.
스웨터를 몇 겹 껴입고 이불을 돌돌 말고 돌아다니는 내가
'김말이'처럼 보였다.
다행히, 전기안전공사의 기사까지 출동해 손을 본 후에야
차단기는 제자리로 올라갔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도 이쁘고,
오래된 냉장고의 소음도 반갑고,
잠 잘 때 성가시던 비디오데크의 시계불빛도 찬란하다.
잠을 설치고 콧물 훌쩍이며 잠긴 목소리를 내던 나는
보일러 때문에 따뜻해진 방바닥에 그냥 누워 잠들었다.
여전히 '김말이'인 채로.
그 안도감, 따뜻함, 안온함....
행복감,
참으로 오래간만에 맛보는 소박하고 단순한 행복감.
내 머리속에도 가슴 속에도 가끔 누전차단기가 작동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