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떠오른 옛기억....
sadsong
2001.07.05 20:00:11
고등학생때, 반 아이들 중에 보약을 먹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특히 3학년이 되면서 그 수는 점차 늘어갔다.
때만 되면, "비닐팩에 든 갈색물"을 가방속에서 꺼내들고 쭉쭉 빨아먹는다.
그런데, 난 그 모습이 싫었다.
(아무리 학업이 어쩌고, 입시가 저쩌고, 피로가, 체력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어려서부터 팔굽혀펴기를, 아령들기를, 혼자하는 어설픈 '액션'을 즐기던 나는
운동 한번 안해본, 가만히 책상에만 앉아서 "약"의 도움을 받으려는 그들의 모습이 싫었다.
적어도 팔팔하던 그 시절엔 그랬다.... "약은 무슨.... 운동이 최고!"
우스운건, 그런 운동들이 체력, 건강과는 별 관계없는 단지 "겉모습 만들기용"이었다는....
차라리 조깅을 했었더라면 설득력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늘 피곤해하는 "직장인" 형을 위해 사놓은 비타민.
그 7할을 "백수"인 내가 먹어치웠다....
아무튼....
그러던 어느날, (표현 참 백만번스럽군....)
엄마가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보약을 지어주시겠다고 한다.
당연히, 그딴건 절대 안먹겠다고 뜻을 밝혔는데....
며칠 뒤, 반 아이들이 빨아먹던 바로 그 형태의 보약 다발이 내 앞에 놓인다.
여기서 나의 "황소고집 & 싸ㄱㅏ지 없음"은 그 힘을 십분 발휘하여,
"싫다고 했는데도 사왔으니 난 절대로 안먹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이왕 사왔으니 한번만 먹어보라"는 엄마의 설득도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게, 그 한아름의 비닐팩들은 단 한놈도 뜯겨져보지 못한 채, 냉장고 속에서의 날들을 보내게 된다....
나의 버티기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여러날 계속됐고, 한참 뒤, 텅빈 냉장고를 보며 엄마에게 물었더니,
"갖다 버렸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긴, 물리거나 남을 줄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니까....
내가 지은 죄를, 그땐.... 잘 몰랐다.
대입준비 한답시고 고생하는, 그래서 안타까운 자식을 위한 엄마의 정성이었던 것을....
없는 돈에, 그래도 남들 해주는 것 정도는 쳐지지 않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인 것을....
혼자 잘났다며 고집피우는 18살짜리 아들을 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랑을 비수로 되돌린 꼴....
못이기는척 먹고 말걸....
그 땐 몰랐다. 그런 작은 기억들이
"피눈물나도록 가슴에 맺힌 한"으로 서서히 자리잡혀가게 되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돌처럼 아주 단단히....
그 보약을 정말 버렸는지,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이후 지금까지 다시 되묻진 않았다.
내 가슴속에선 점점 단단해져가더라도 엄마에겐 잊혀진 기억이 되도록....
오늘 신문에서 "마늘과 콩"이 최고의 건강식품이란 기사를 접했다.
건강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그시절 '보약사건'이 떠올랐고....
그리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 10년을 더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봤다.
적어도 그중 5년은 내 몫이란 생각을 하면서....
....
.....
......
아.... 바로 며칠전에도 어떤 일로 그 때와 비슷한 아픔을 드렸다.
참을 수 있었는데.... 정말 참을 수 있었는데.... 왜지? 이제 알만한 나이도 됐는데....
몇 달, 몇 년 걸려서 깨닫던 것을, 단 1분만에 깨닫게 된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창밖에 비까지....
반쯤 죽도록 절 때려주시거나 우리 엄마를 젊고 건강하게 되돌려주실분....
이 글을 쓰는 지금, 컴퓨터 자판이 고무로 쌓여있다는건, 정말 다행....
sadsong / 4444 / ㅈ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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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당신도 꿈 많았던 소녀였죠
하얗게 센 머리칼 하나 둘씩 늘어
눈가엔 어느새 주름 져도
내겐 언제나 제일 아름다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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