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제대로 당했습니다.

tldmlgla 2010.05.11 23:08:49

 제목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당했습니다"라고 정해놓으니

제가 참 바보스럽게만 느껴지네요


이 내용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 적는 실화이며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영화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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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3시 20분경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단편영화를 준비하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밝히더니 (나중에 알고보니 피디라고 하더군요)

첫번째 하는 말이 "저의 영화에 출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더군요

좀 어이가 없죠

작품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서는 "저의 영화에 출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또한 촬영일자가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아야지 답을 해줄 수 있을텐데요..."라고

그 학생에게 말했더니

대략적으로 전화를 한 사람이 말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기러기아빠에 관한 내용이라면서

저의 이미지가 자신들이 준비하는 영화의 주인공 캐릭터와 너무도 똑같아서

저를 캐스팅 하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촬영일이 이번달 14,15,16일 이라고 말하더군요

어제가 10일이니까 크랭크인까지 남은 기간은 겨우 4일 남았네요


제가 17일부터  몇일간 촬영일정이 잡혀 있어서 많이 고민스럽더군요

하지만, 잠시 스친 생각은...

'이 사람들이 아직 캐스팅을 못했다면 참 많이 힘들겠다' 라는 생각이더군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좀 보자고 했습니다


메일주소를 문자로 보내자 바로 메일이 왔습니다


시나리오는 ... (남의 시나리오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안하겠습니다)


메일을 보고는 조금 고민을 해야겠다 싶어서

동네 사우나에 가서 몸을 식히고 나왔더니

메일을 보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2번 와 있습니다


"아차!!!, 이 사람들이 참 급할텐데 내가 좀 더 빨리 연락할걸 그랬구나" 하는 생각에

사우나에서 옷을 입으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시나리오가 이렇고 저렇고 하다...그래서 연출자와 통화하고 싶다" 라고 했죠

얼마후 연출자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연출자는 시나리오에 관한 내용을  저에게 얘기하면서

그 전에 전화했던 사람이 얘기했듯이 자신들이 찾는 캐릭터와 흡사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무명배우인 제가 괜히 비싼척 하는 것 같아서

이미 잡혀있는 5월17일 부터의 촬영일정을 얘기하면서

그 촬영에 문제만 없다면 출연하겠다고 얘기 했습니다


그러자 연출자는 내일(글쓴 시간으로는 오늘 5월11일) 직접 봤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5월11일 15시 충무로 대한극장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연출자가 배우를 직접 찾아가 보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참 고마웠고

이런 마음가짐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약속날짜인 오늘 5월11일


청주에서 저를 보러 오겠다는 연출자가 고마워서 늦지 않으려고 일찍 나갔습니다

대한극장앞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저 사람이 약속한 사람일까?  아니군   그렇다면 저 사람이 약속한 사람일까?"

너무 일찍 나간 탓에 약 30분 이상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약속시간이 조금 지난 15시 02분


갑자기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연출자와 통화할 때 바보같이 연출자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던게 더 큰 문제를 만들었네요


맨 처음 통화했던 피디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연출자가 직접 서울에 만나러 간다고 약속을 했다고요?"

피디라는 사람의 그 한마디에 많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분명해지더군요

피디라는 사람은 그러더니 "조금 알아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예상하시죠?


예, 님들의 예상대로입니다

어떤 누군가가 그랬죠...약속은 깨기 위해 있는거라고... ㅎㅎ


하지만, 미련하고 바보같은 저는 그래도 그 연출자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충무로 대한극장 바깥에 걸린 영화포스터를 보면서 40분 정도를 더 기다렸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피디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해보곤 했습니다

결과는 .......

피디라는 사람마저도 저의 전화를 안받네요 ㅎㅎ


충무로 대한극장앞에서 포스터 구경하면서 피디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7번 했습니다

세번은 통화중인걸로 봐서는 어느 누군가와는 통화를 하면서 저의 전화는 안받는거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쓴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이 사람들이 내가 집으로 가는 동안 미안하다고 전화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문자라도 한번 하겠지' 라고 일말의 기대를 해 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22시 55분까지도

전화, 문자, 메일 모두 안왔네요


제가 참 바보스럽고 무기력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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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나이가 48살입니다


저에게 연락을 해서 단편영화를 준비한다는 학생이 2학년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자신들의 부모 나이도 저와 비슷하겠지요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영화계 선배로서

그런 사람들과의 약속을 했다는게 참 부끄럽고 수치스럽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과 작품을 안하게 된게 참 다행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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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한민국의 영화가 잘 되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영화계가 투자가 어떻고, 배우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많은 얘기들을 합니다

그리고,  이 글에 있는 학생들 같은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세미나를 할때면 똑 같이 얘기 할겁니다


네!!! 대한민국의 영화계 투자, 배우, 환경 참 힘든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 있는 학생들 같은 사람들이 영화를 한다는 것 역시

대한민국의 영화계에 감점요인일겁니다


오늘 일로 인해서 참 많은걸 배웠습니다

오늘 일로 인해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수치심도 배웠습니다


그 학생들의 그 작품 과연 잘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인생 선배로서, 영화계 선배로서 그 작품이 잘 되기를 기대해봐도 될까요?


................. 덧붙입니다 (23시18분) .....................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학생들은 본인들의 배우 모집글을 지우지 마세요

본인들이 필커 게시판에 올린 배우모집 내용을 캡쳐 해 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