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고3 학생이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3개가 있는 중소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다양성 영화가 거의 개봉이 되지 않는 지역이라 독립영화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 상업영화에 한정해서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장르에 상관없이 영화마다 감정선이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겁니다. 자잘한 웃음-비장-뜨거운 눈물-개운한 해피엔딩의 패턴이 약간의 눈속임이나 변주의 노력조차 없이 매번 반복되어서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제쯤 비장한 음악이 흐르면서 슬로우 모션이 나오겠구나' 하고 예상이 가능하고 대부분은 틀림없습니다. 지겹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불쾌하기도 합니다.
흥행공식을 그대로 따른 영화를 보면서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관객인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영화를 만드는 주체는 보통 투자를 하는 대기업 입니다)적당히 웃기다가 눈물 한 번 뽑아주면 영화가 좋다고 하겠지? 돈을 내겠지? 천만 관객이 들겠지? 기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노골적으로 보입니다. 나의 감정을 영화가 감동시키고 공감시켜야 할 감상의 주체가 아니라 돈을 짜내는 도구로 대우하는 것 같은 태도가 불쾌합니다.
마찬가지로 참 안타까운 점은 배우의 낭비입니다. 한국에는 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훌륭한 배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상업영화에서 그들이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중장년층 여성 배우의 작품 기근이 매우 심각합니다. 애초부터 나이에 상관없이 남성 배우에 비해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캐릭터나 장르에 아직도 제약이 큰 한국 영화계에서 나이든 그들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내 뿐입니다.
게다가 많은 상업영화가 상투적인 연출과 시나리오를 배우의 연기로 힘겹게 만회합니다. 심지어 배우들이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시나리오의 캐릭터가 충분히 입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영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닌 그 캐릭터를 훌륭히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배우가 캐릭터를 압도해버리는 연기를 우리는 좋은 연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하게 연기한 배우의 잘못이 아니라 배우의 실력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시나리오와 연출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큰 문제는 이런 영화에서는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이나 창의성, 스타일이 보이지 않고 냉혹하게 계산된 그래프와 회의실의 책상이 먼저 보인다는 점입니다. 독립 저예산 영화에서 좋은 작가, 훌륭한 감독들이 과거에도, 또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이 상업영화로 와서는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들은 왜 독립영화에서 뽐내던 재치와 개성을 상업영화에서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을까요? 가끔씩 기업들이 더 이상 봉준호나 박찬욱을 원하지 않는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감독은 그래프와 계산된 시나리오를 스크린으로 옮겨줄 사람이지 작가가 아니라고요.
상업영화는 영화예술이 대중과 소통하는 통로이며 영화계의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교육의 장이며 영화인들이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자본을 벌어들이는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상업영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상업영화가 다양성과 창의성을 유지해야만 독립영화 역시 보호받고 성장할 수 있으며 영화시장이 건강하게 돌아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 상업영화는 지금 다양성과 창의성을 잃었고 이것은 경제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기에 힘없는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과제입니다.
영화인으로서, 그리고 관객이자 예비 영화인으로서 건강한 영화 시장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의심없이, 불안감없이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를 선택하기 위해서 할 수 있고 또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의견을 묻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