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시사회 다녀와서.

sadsong 2002.03.29 23:41:03
일곱의 자식을 두고도 수십년째 혼자 살고 계시는 나의 외할머니는,
이미 30년전쯤 남편을 잃었고,
4년전쯤엔 큰 아들을,
작년엔 남동생을 먼저 보내야 했다.

10대 후반의 어느순간, 스스로 다양한 깨달음을 얻은 나는,
어린시절 어렵게만 여기던 나의 외할머니를
친근하게, 사랑스럽게, 슬프게, 다시 맞게 되었다.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게 되었고,
맨발을 주무르게 되었고,
포옹하고 뒤돌아 나올땐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다.

지팡이 없이는 몇발짝도 옮기기 힘드신 할머니가,
가만히 앉아 바느질만 해도 숨이차다는 할머니가,
이제 다 죽게 되었고 말씀하시는 할머니가,
미국사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몇 달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떠나셨다.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유로 큰 결심을 하신것.

어제 저녁, 그렇게 할머니와 외숙모를 공항터미널에 모셔다 드리고,
멀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손을 흔드시는 할머니와 특별한 감정의 작별을 하고서....

제다이님께서 제공해주신 <집으로...> 시사회를 보러, 명동으로 향했다.


대전제 #1 - 나는 아이들이 싫다. 정말 싫다.
               '애'가 이끌어가는 영화, 드라마, 쇼, 코메디 역시.... 싫다.
대전제 #2 - 슬픈건 다 좋다. 좋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내 피가 슬프다.
대전제 #3 - '애가 나오는 슬픈영화'라는 <집으로...>는 보고 싶었던 영화이다.
대전제 #4 - 영화가 아주 좋다는 여러 평을 들었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대전제 #5 - 영화평은 정말 잘 하지 못하겠다. 잘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동안 보아온 이 영화의 홍보는, 좀 화려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가수 안치환님을 SM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지먼트라도하는 듯한 느낌이라면 비슷할까.
(아.... 물론 그 의도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어색한 느낌은 초반의 영화속에서도 얼마간 지속된다.
내가 연출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탓일수도 있겠지만, 꼬마아이의 연기가 한동안 거슬렸다.
이건 연기를 잘했다 못했다의 의미가 아니고, 그러니까.... 좀 과하다고나 할까....
뭔가가 좀 과하게 포장된 듯한 초반부.

그리고, 내 생각과는 다른, 저마다의 반응을 드러내는 관객들. ㅡㅡ;
한국인은 웃음이 없는편이라고 하는데.... '적절치 못한 웃음'면에선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초반 약간의 불편함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사그라들었고.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과.
아름다운 풍경과.
따듯함과. 애틋함과.
어느때부터인가 주변 이곳저곳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울려면 많이 울 수 도 있었고, 안 울려면 참을 수도 있는데,
영화 막판에, 갑자기 나의 할머니 생각이 떠오르는 바람에, 순간 참지 못하고 잠깐을
관객들과 함께했다.

그래, 영화속 엽서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되더라.

어디선가의 이정향 감독님 인터뷰에서 "배우 아닌 분들에게 반복해서 같은 연기를 시켜야
했던 상황들이 몹시 어려웠다."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영화 보는 내내 그 어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예견되었을 그런 어려움과 부담을 감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 대담함에도 점수를.

그쯤에서 끝낸게 좋았다는 생각과, 뭔가 더 있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간사한
생각이 교차할때쯤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실제로 영화시간이 짧았던 것 같기도 하고(?) 영화 자체가 짧게 느껴지기도 하고,

재기발랄한 엔딩 크레딧도 관객들을 두, 세 번 크게 웃겨주었다.
(그리고, 제다이님을 아는 분들에게는 덤으로 한번 더 웃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어제는 영화 상영뒤에 메이킹 필름도 보여주었는데,
물론 그 자체가 흥미롭고 재미있긴 했지만, 영화감상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에게는.
영화의 잔상을 남기기에는 바로 이어진 메이킹필름속 이야기들은 방해가 될 수 있는것이지.
좀 시간이 지나고 다른 경로로 따로 봤으면 더 좋았을뻔 했다.


'아.... 내가 오늘 우리 외할머니를 보내고, <외할머니 영화>를 본거구나....'라는 생각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떠오른 것은 신기한 일이다.

영화속 생생한 자장면 먹는 소리에 몸부림치던 나는, 다른분들을 꼬드겨 중국집행을
이끌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늦은 시간이어서 중국집을 찾아내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

이러면 안되는데.... 결국, 영화이야보다 주변 이야기만....
이게 영화감상평인지 에세이인지.


1918년생인 나의 외할머니 성함은 장.부.전. 이시다.
(이 문장은 따라한 것이다.)

sadsong / 4444 / ㅈ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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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의 첫 수상 소감은 "외할머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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