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작가가 없다?

mbs7555 2005.03.06 01:11:59
충무로에 작가가 없다?

제작사에서 전화가 옵니다. 당신의 글빨을 사고 싶다고...

지망생들은 영화사에서 연락이 오거나 당신의 작품을 감동 깊게 읽었다고 하면 그 순간 뿅가서 뒤로 나자빠질 겁니다.

어쩜 잔치라도 할지 모르죠. 사돈에 팔촌까지 부르고, 부모님은 우리 자식 드디어 출세한다며 감격하겠죠...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나 영화사랑 계약할 것 같아, 하고 입력된 전화로 다 문자 보내고 난리나죠.

은근히 니들 이제껏 나 개무시했지, 너희들 장동건 사인이라도 받고 싶으면 앞으로 나한테 잘 보여야해.

전지현? 걔 작가한테 깜빡 죽잖아...

난 주인공으로 설경구를 생각하고 썼는데 내가 요구하면 영화사가 아마 설경구한테 내 작품을 보내 캐스팅을 논의하겠지, 단박에 매료되선 출연하겠다고 먼저 덤빌걸. 이런 상상 속에서 살게 되겠죠.

그러나 이것은 계약을 논하기 전 상황일 겁니다.

만약 작가가 계약을 요구한다면?

아, 작가님, 당신 정말 글 재밌데요, 꼭 한번 뵈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하면 식사나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십쇼.

너무 황송하고 어쩔 줄 몰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면 기싸움에서 집니다.

대부분의 영화사가 당신이 계약을 하고 싶다. 문서에 도장을 찍고 싶다고 하면 갑자기 태도가 변할 겁니다.

어쩜 휴대폰을 꺼내, 어, 또 다른 작가인 김작가가 있었구나 깜빡했네...하면서 당신의 요구를 못들은 척 하거나 충무로에 널린 게 작가야, 들으라는 듯 말하겠죠.

혹은 바쁜 척 회의가 있어서 잠깐 자릴 피하거나..할 겁니다. 영화사가 작가를 찾을 때는 십중팔구 기존의 작가들이 모두 도망가서 아무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왜 집필을 중단할까요? 당연히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걸 돈으로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버티다 버틴 작가들은 결국 짐을 싸서 떠납니다.

그럼 제작자들은 욕을 하죠. 끈기가 없다느니... 열의는 없고 돈만 밝히는 게 무슨 작가라고...


제작사는 시나리오 쓰는 걸 대부분 이렇게 판단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건을 살 때 진열된 물건을 고르고 사야지 뭐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당신을 믿고 선불금을 줍니까?

일단 써라. 쓴 걸 보고 하자.

프로들은 처음부터 이런 얘기 안해. 초 치는 거거든. 한 배를 타야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계약계약 하는데 충무로 예전엔 이러지 않았어. 그땐 의리가 있었어, 의리! 할겁니다.


그럼 초보 작가는 괜히 주눅들고 겁먹고 짤릴까봐, 어머 나 이러다 충무로서 왕따 되는 거 아냐 하면서...그래 열심히 쓰자, 내 실력을 보여주자! 그럼 무시 못할 거다 하면서 그들의 페이스에 서서히 말려들기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작가는 집에 처박혀 폐인이 됩니다. 부모님은 아이고 우리 자식이 원고 집필하잖아, 아마 주연배우가 장동건이라지 하면서 소곤소곤 전화를 친척이나 동창에게 걸겠죠. 한달 두달 세달... 당신은 점점 미쳐갑니다.
제작사는 밥한끼 선심쓰듯 사주며 음, 얼마나 썼어? 우리모두 작가님 글 기다리고 있잖아. 대박한번 나자구, 대박!
초고가 나옵니다....
저 휴대폰 요금이랑 카드 대금이 밀려서... 어떻게...
그럼 제작사는 갑자기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작가! 자네 때문에 프로젝트가 자꾸 세월을 보내잖아... 제작부며 연출부며... 놀고 있잖아. 일단 글이 나와야지...
작가는 갑자기 이 모든 책임이 저 때문인 걸로 알곤 부담을 갖게 됩니다.
아 빨리 쓰자... 쓰자...
그러면서 똥구녕을 살살 간지릅니다.
이번 작가 작품은 아마도 봉준호나 박찬욱이 어울려. 저번에 투자가 만나서 슬쩍 얘기해 줬거든. 그랬더니 깜빡 죽더라고, 축하해!
병신 같은 작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솨, 감쏴....
어때? 우리가 다음주에 감독 선임 문제로 한번 미팅을 잡으려고. 괜찮지 봉준호 감독.
그럼요 황송할 따름입니다....
배우 누구 생각한 사람있어? 우리 대표가 마당발이잖아. 연예계에...
전 그저... 원빈도 좋고 장동건도 좋고...
동건이? 걔 우리 영화사에서 컸어? 몰랐지? 전화 한통이면 만사제쳐놓고 달려오잖아.
한번 만나게 해줄까?
오, 주여... 감쏴, 감솨...

그러니 열심히 써.
네.

그저 열심히 글만 잘 나오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야.

모든 에너지를 글에 집중해!

요즘 잔머리 굴리는 것들은 말야 계약이다 돈이다 뭐다 이런 거에 환장해서

글빨이 안 올라. 당연히 머리가 복잡하니 그렇지.

꼭 그런 것들은 글이 형편없다니까.

일단 집중해. 시나리오에... 알았지?


다시 한달 두달 ...반년...일년이 지나갑니다.
초고 2고3고4고....

작가는 지쳐갑니다. 이젠 모든 에너지를 다 뺐겼습니다. 껍데기만 남습니다.

투자사에 밀어 넣었는데 반응이 안좋아.
큰일이네. 영화사가 계발비로 투자한게 얼만데...
작가는 이 모든 게 다 자기 책임 같게 느껴집니다.
글 좀 잘 써봐, 재미가 없데잖아...
일년 이년... 다시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이젠 견딜 수 없어 전화를 겁니다.

저 원고료 좀...

그럼 버럭 화를 냅니다.

작가! 너무하는 거 아냐?
작가가 글을 이따위로 써서 제작사가 손해를 얼마나 받는 줄 알아!
글구 본인이 스스로 하겠다고 덤벼서 써봐라 한거지...

영화사 문 닫게 생겼어.

(요즘도 근처 식당 음식값 밥값 계산 안하고 폐업하는 영화사가 부지기수죠)
영화사 사정 뻔히 알잖아.
그러지 말고 작가, 이번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는데 작가가 딱이야.
그거 한번 붙어봐.
일단 지금 작업은 keep하고.

이렇게 작가라는 밧데리는 점점 방전되고 나중엔 폐기처분 됩니다.
다들 이런 과정을 겪고 충무로에서 사라집니다. 상처를 받고.
그럼 제작사들은 말하죠.

충무로에 작가가 없어... 큰일이야....

열정과 끈기도 없고,

조금 힘들면 나가떨어져.

돈 벌 궁리만 하니 글이 써져?



박대표, 근처에 괜찮은 작가 하나 없어?

우리 전속 작가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 뒀거든.

대우?

충무로서 우리 영화사만큼 대우해주는 데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