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독립 영화

neosane 2008.06.02 09: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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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그렇겠지만, 처음이 중요하다. 갓 태어난 돼지새끼는
눈을 뜨는 즉시 보이는 대상을 "엄마"로 삼는 것처럼.
구직을 위해 할리우드를 맴돌면서 처음으로 만난 프로듀서.
나는 그가 정말 프로듀서인 줄 알았다.

때는 2월, 2007년. 지원한 곳은 많지만 연락 온 것이 전무했던
까닭에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까짓 것 할리우드가 대수겠어,
라는 청춘의 자신감이 백수의 자의식으로 거듭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연락이 왔다. 어디에 지원했을 지도 모르고, 그저
어시스던트라고 소개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프로듀서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즉시 달려가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집으로 와서 냉큼 부랄 밑까지 깨끗히 씻고서는 인터뷰를 준비했다.
대학교 재학 시절 만들었던 단편 영화 6편. 너무 못 만들어서 보여주기
쪽팔리고, 그나마 낳은 건 단편 다큐. 보여줄 시간이나 있을까?

PA가 되기 위한 조건을 나름대로 고민해봤다. 잔신부름을 많이 해야 되는
까닭에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이 필요했고, 보험들지 않으면 바로 자동차를
빼앗아버리기 때문에 보험도 가입해두었다. 자동차도 리스했겠다, PA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충족시켰다. LA도시 지리도 대략 익혔고, 궁상맞게
보이기 싫어 옷도 나름 깔끔하게 입고 갔다.

가야 되는 장소는 멜로즈라는 길가에 위치한 8878번지. 할리우드 스타들의
화려한 드레스나 슈퍼스타에게만 개방된 빈티지 샵들을 지나서, 화려한 빌딩들이
허름한 빌딩으로 뒤바뀌고 잔디조차 깍이지 않은 음흉한 지역으로 들어섰다.

나를 반긴건 어시스던트. 프로듀서가 지금 바쁘니 잠시 기달리고, 로비에 나를
남겨두고 들어갔다. 로비에 놓인 잡지들은 대부분 "독립영화 만들기" 따위였다.

10분 뒤, 나는 프로듀서 방으로 불러 들여갔다.

4평 남짓한 프로듀서의 방은 3명이 차지하고 있었다. 내게 전화한, 그리고 나를
반긴 어시스던트가 문 앞에 앉아있고, 그 옆에는 샤워와는 거리가 먼 듯한 여자가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120kg정도에 여덟 겹 정도 되는 뱃살, 그리고 세 줄 정도의
턱살을 가지고 있는 프로듀서가 앉아있었다.

"이력서를 보니 영화 일은 해본적이 없네요."

"네. 그렇지만 대학교 때부터 영화를 찍어서 책임임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운전 면허증도 있고, 보험도 있고. 괜찮네요. 근데 처음 해보는 거니깐 페이가
없는 건 아시죠?"

"네.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노페이(no pay)로 일할 생각이 있습니다.
근데 어떤 영화죠?"

"아. 어떤 영화냐. 좋은 질문이군요. 야 대답해봐"

프로듀서는 여자 어시스던트에게 말했다. 빗질 하지 않은 머리카락, 누리끼리한
무언가가 묻혀져 있는 셔츠를 입은 게 눈에 띄었다. 칼칼한 목소리. 담배를 하루
두 갑 정도는 비우는, 그런 목소리였다.

"어떤 변태 같은 집주인이 여대생 4명을 집안 지하실에 감금해서 폭행, 고문, 그리고
기타 등등을 하는 공포학대 영화해요."

"바로 그거야." 프로듀서는 대답했고, 그 옆에 어시스던트는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봤다. 아무말도 않고 가만히 프로듀서를 응시하자, 그는 대답했다.

"지금 5M(50억)을 투자 받는 과정에 있는 중이지. 아주 괜찮은 공포 영화가 될꺼야."


집으로 돌아와서 프로듀서의 이름을 imdb에 쳐 넣어보았다. 결과물은 딱 하나 나왔다.
2006년 할리우드서 제작된 <그리다이언 갱>에서 PA를 한 경력. 정확히 1년 뒤에는
프로듀서로 탈바꿈한 것이다.

전화가 왔다. 내게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한 어시스던트가 "뽑지 않겠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해주기 위해서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봤다. 저 멀리 산 중턱에 걸린
할리우드 싸인이 LA스모그에 휩싸여 잘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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