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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자 편지 - 퍼온 글

jelsomina jelsomina
2000년 11월 02일 15시 56분 12초 7429




석사논문을 쓸 때 일이다. 권필의 '空山木落雨蕭蕭'란 구절을 "텅 빈 산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옮겼더니, 스승께서 '넌 사내 녀석이 왜 그리 말이 많으냐?' 하신다. 영문을 몰라 서있자니 '空'자를 짚으시며 "이게 무슨 자야?" "빌 空잡니다." "거기에 '텅'이 어디 있어?" " '나뭇잎'이나 '잎'이나. 부슬부슬 하면 됐지 부슬부슬 올라가는 비도 있다더냐? '떨어지고'의 '떨어'도 떨어내!" 하시더니,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고쳐 놓으신다. 신통하지 않은가? 말은 반으로 줄었는데 뜻은 곱절로 살아나니 말이다. 나는 여기서 문장의 묘리를 크게 깨달았다.

함경도 안변에 있던 양사언이 한양의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반가워 뜯어 보니 사연이라고는 "三千里外心親一片雲間明月"이란 딱 열 두자 뿐이다.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그래 이만 사연 전하자고 천리길에 편지를 부쳤더란 말인가? 너 보고 싶어 죽겠는데, 마치 구름 속에 숨은 조각달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으니 안타깝다는 말씀이다. 별말 없이도 마음은 마음으로 통하고, 정은 행간에 고여 넘친다. 고맙지 않은가? 그 편지를 손에 들고 안변 쪽을 바라보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을 백광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둘러봐도 살가운 마음 나눌 데 없고, 들리느니 말의 소음 뿐이다. 깊은 밤 연구실에 앉아 하루의 언어를 돌아보면 까닭없이 부끄럽다. 어떤 수다, 어떤 요설로도 채워지지 않는 여백, 말할수록 달아나는 그 '텅빈 충만'의 세계가 그리울 때가 있다. 옛 책 갈피에서 우연히 만나는 옛 어른들의 따뜻한 체취, 천근같은 무게에 코 끝이 찡할 때가 있다.
젤소미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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