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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시간(屍姦) 당했다....

sandman sandman
2001년 06월 19일 20시 06분 51초 12399 2
재미있는 이야기 앞으로 주기적으로 올릴까 합니다.

제가 한 1년전에 만든
(회원이 100명도 안되었지만...)
어느 인터넷 사이트 클럽에서
그 사이트의 접속의 시간이 현저하게 늦어지는 바람에
회원들 다들 떠나버리고....
그 사이트의 클럽이 거의 폐쇄되다 시피 한 건데...

그래도 제가 시삽으로서 열심히 자료를 올린 것이
아깝기도 하고 그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그 때 회원들은 거의가 외국거주 한인 교포들이라서
주로 우리나라의 재미있는 그리고 감춰진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긴 그 때 제가 역사소설에 대한
역사추리형식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다가 알게된
내용들을 쓴 것인 데....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꽤 있읍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아마 심심하면 하나씩 올릴 듯 합니다.
그 중 제일 충격적인 이야기가 이 내용이었지요.
아울러 발취문단은 출처를 명시 해 놓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어찌 이럴수가.. 반인륜적 야만 행위)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백성현.이한우 지음, 새날

책을 읽다가 참으로 분노에 차는 감정을 느껴 이 글을 올립니다.
어떤 분은 그러셨죠.
" 한국민은 분노를 잊고 사는 민족" 이라고....
이하 본문은 글 그대로 올립니다.

청일전쟁 이후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조선 정부에 대해 지나친 내정 간섭을 자행했고,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했다. 왕실뿐 아니라 모든 조선인이 이에 대해 매우 불만이 고조되어 있던 중 일본의 만주 진출이 독일, 프랑스, 러시아 삼국 동맹에 의해 좌절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 은 명성황후(1851∼I895)를 제거하고 친일 정권을 세우려고 음모를 꾸몄다.

1895년 8월 20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 군대와 낭인 그리고 해산설로 불만이 고조되어 있던 훈련대원들 일부를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한다. 세자가 상투를 붙들린 채 쓰러졌고.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고종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살해당한 후 불태워졌다. 이 사건이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일본 당국은, 대원군과 일부 조선인들이 저지른 범행이며, 명성황후는 대궐을 탈출하여 몸을 숨겼다고 날조하여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도하지만,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미국인 교관 다이와 러시아인 전기 기사 사바친(G. Sabatin)에 의해 진상이 밝혀지자 나라 안팎이 들끓게 된다.
그러자 일본은 미우라 고로를 비롯하여 범행에 가담했던 48명을 본국으로 소환하여 형식적인 재판에 회부하지만 이내 전원이 무적로 석방되었으며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한편 국내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그림 「조선 왕비의 살해」라는 제목으로 1895년 프랑스 삽화가 리온 르와이에가 당시 상황을 리얼하게 재현시킨 기록 동판화로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당시 서양 외교관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사건의 실상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시해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 이 그림에서. 현장을 이처럼 시각화하려 했던 서구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 사건이 한마디로 문명을 파괴하는 전형적인 야만행위로 너무도 경악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자객들의 시퍼런 칼에 젖가슴 등 온몸을 난도질당하고 피를 흘리며 무참하게 쓰러진 왕비 곁에는 관(冠)이 나뒹굴고 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죽어 가는 시신을 노려보는 자객들의 눈매에는 살기가 등등하다. 아직까지 명성황후의 시해와 관련된 사진은 물론 삽화조차도 발견된 적이 없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명성황후의 진짜 얼굴도 밝혀지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시해 헌장을 묘사한 100여 년 전의 이 삽화는 비록 자객이나 황후의 얼굴이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특파원들의 보고를 근거로 사실성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 황실에 고용된 러시아인 전기 기사로서 왕비 살해 현장에서 극적인 상황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사바친의 증언은 가슴을 졸이게 한다.

"30여 명의 일본자객들이 왕궁으로 돌진하면서 '왕비가 있는 궁이 어디냐'고 다그쳤다. 그들은 왕비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자백을 강요하면서 측근 신하와 궁녀들을 무지막지하게 다그쳤다. 그 순간 나도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자객들 속에는 일본 군복을 입은 자들도 섞여 있었다. 현장에 있던 왕자는 황후에게 접근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왕자의 방으로 들이닥친 자객들은 왕자를 보자마자 내동댕이쳤고 이를 제지하는 궁전 내관 이경직을 살해했다. 짓이겨진 왕관과 왕위의 위엄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은 칼을 들이대면서 왕비의 소재를 찾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시퍼런 칼로 조선의 왕비를 무참 하게 쓰러뜨렸다. 요행히 살아 남은 궁녀들이 왕비의 시신을 덮어 옮기던 중 시신이 드러나자 경련하며 통곡하고 말았다

최근에는 일본의 다큐멘터리 작가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에 의해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는 저서 『민비암살(閔妃暗殺)』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민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들 가운데 동포인 나로서는 쓰기 어려운 행위가 있었던 것이 보고되어 있다. 법제국 참사관을 지낸 자로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내무부)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는 법제국 장관 스에마츠에게 보낸 보고서 속에서 '참으로 이것은 붓으로 쓰기가 견디기 어렵지만‥‥

이라고 전제한 뒤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

그 행위란 시간(屍姦)이었다.


* 제다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03-17 20:42)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JEDI
2001.06.20 04:49
샌드맨님 덕분에 사이트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늘 감사합니다. 심심하면 하나씩 올리신다는 얘기들..참 기다려집니다....
Profile
sandman
글쓴이
2001.06.22 03:43
별 말씀을 쑥쓰럽게...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 ^^; 감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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