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겸임교수 제자이자 동료 준강제추행 혐의로 검찰 송치
피해자 근로계약 없이 2여년간 가해자쪽 영상촬영•보조 업무 생계 등 불이익 감수하며 신고
"후배들이 문제제기 못할까 염려" 모교에 대자보 붙이는 등 사건 알려
"제가 강제추행을 당했는데요. 가해자가 직장 상사는 아닌데 상사 같은 사람이에요. (•••) 업계에 소문나서, 생계가 끊기면 어떡하죠?"
지난 1월23일 지은(가명·20대)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여성 긴급전화 1366*에 전화를 걸었다. 이날 새벽 대 학 재학시절 '교수님'이자 영상촬영·편집업계 선배, 사 실상 그의 고용주인 7씨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술에 취해 작업실에서 잠든 지은씨 신체를 7씨가 만 진 것이다. 영상제작업체를 운영하는 7씨는 지난 4 월말까지 인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대학 4학 년 때 7씨 수업을 들었던 지은씨는 졸업 뒤 2년여 동 안 그의 회사가 진행하는 대부분의 촬영현장에서 '연 출팀 막내', '조감독' 등으로 불리며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해왔다. 7씨가 알선해준 영상촬 영·편집 보조 업무로 생계를 꾸리고 '뮤직비디오 감 독'이라는 꿈에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ㄱ씨를 경찰에 신고하면 앞으로 이 업계에서 일할 수 있을까. 눈앞이 아득했다. 그렇다고 성폭력 피해를 그냥 넘길 순 없었다. 3년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대학 강단에 선 ㄱ씨를 동경하고 따를 후배들이 떠올랐다. 인하대 겸임교수였던 ㄱ씨는 현장을 볼 기회를 준다며 학생들을 촬영 현장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 “3년 전 내가 꿈에 매몰돼 가해자를 마냥 우러러봤던 것처럼 후배들도 앞뒤 재지 않고 가해자를 따라다니다 저와 같은 경험을 할까 봐 걱정돼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성폭력 피해 이후 수입 넉 달째 0원이지만
지은씨의 용기로 경찰 수사가 진행됐다. 김포경찰서는 지난 4월5일 ㄱ씨에게 준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인천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그러나 ㄱ씨는 곧바로 수업에서 배제되지 않고 한 달 가까이 강단에 섰다. 보다 못한 지은씨가 직접 피해를 알리고 나서야 인하대 쪽은 4월 30일 ㄱ씨로부터 사직서를 받았다. 인하대 관계자는 한겨레에 “사건 인지 후 바로 해당 교수를 수업에서 배제했고 직위 해제를 검토 하던 중 사직서를 제출해 수리했다”고 밝혔다.
사립학교법을 보면 수사기관이 사립학교 교원에 대한 조사·수사를 시작했을 때와 마쳤을 때 10일 이내에 임용권자(학교)에 통보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인하대 관계자는 “ㄱ씨가 전임교원(정교수)이 아닌 겸임교수라 수사기관에서 통보가 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ㄱ씨 신분이 사립학교법상 교원이 아니라 경찰로부터 수사 착수 등 통보가 오지 않았다는 취지다.
지난 5월3일 지은씨는 졸업한 지 2년여 만에 인하대를 찾았다. 학내 곳곳에 ㄱ씨의 성폭력 사실을 알리는 대자보를 붙이기 위해서였다. ‘인하대의 금요일이 안전할 수 있도록’이라는 제목의 대자보에 이렇게 썼다. ‘가해자는 최근까지 금요일마다 수업을 했습니다. 저 같은 피해자를 막고 싶었습니다.’
혹시나 자신과 같은 피해를 겪었지만 문제 제기조차 하지 못하는 후배가 있지 않을까 염려가 컸다. “저는 졸업했지만 학교에 다니는 후배들은 가해자로부터 학점을 받아야 했잖아요. 같은 상황에서 저처럼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피해자가 왜 꿈을 접어야 하는가
이날 한겨레와 만난 지은씨는 헐렁한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지난 2년간 촬영 현장에 갈 때마다 입었던 “작업복”이었다. “인맥이 곧 재산인 이 업계에서 성폭력을 당해 입방아에 오르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남성용 운동복만 입고 다녔습니다. ‘성적 대상’이 아니라 ‘동료’로 보이고 싶었어요. 남자들에게 힘으로 밀리지 않으려고 촬영 전날에는 매일 두 시간씩 웨이트도 했습니다. 이렇게 조심했는데도 성폭력을 당했다는 게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요.”
성폭력 피해 이후 수입은 넉 달째 ‘0’이다. 가해자 혐의를 입증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새로운 일을 할 여력이 없었고, 성폭력 피해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다. 사건 발생 이후 지은씨는 20㎏에 육박하는 가방을 들고 다닌다. 가해 증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서류 뭉치가 든 가방이다. 12개월 할부로 “거금 들여” 선임한 변호사가 언제 전화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깨에 맨 손바닥만한 손가방엔 알약이 빼곡히 들어찼다. “알약 8개를 먹어야 겨우 잠이 들어요. 우울증, 공황장애약까지 합치면 하루 24개 알약을 삼킵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여고용평등법)에 따라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면 사업주는 필요한 경우 피해자에 대한 근무장소 변경이나 유급휴가 등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 문화예술계 종사자 다수는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므로 이런 법 적용이 쉽지 않다. 2022년 9월부터 시행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예술인권리보장법)엔 예술인 및 예술인이 되기 위해 교육·훈련받는 이들 중 성폭력 피해에 대한 구제·지원 등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해 프리랜서로 일해 온 지은씨는 “이런 법·제도가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문화예술계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들은 성폭력 피해를 공유하고 업계 자정을 도모할 ‘동료’가 마땅히 없다. 지은씨가 “저 혼자 벽보고 하는 얘기가 아니었으면 한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업계 동료이자 선배인 한 영상감독이 써준 탄원서는 지은씨에게 단단한 희망이 됐다.
“피해자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영상 꿈나무들 중 가장 재능있고 미래가 밝은 친구입니다. 인맥이 가장 큰 재산인 영상업계는 (…)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나 사회적 시스템이 전무하기 때문에 다양한 폭력이 쉽게 묵인됩니다. 피해자의 생계이자 꿈의 터전인 영상업계에 피해자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선 가해자에게 엄벌이 필요합니다.”
지은씨는 이제 되묻는다. “피해자가 왜 꿈을 접어야 하나요? 저는 제 꿈을 무조건 이룰 거에요. 그러기 위해 제가 발 담근 이 업계를 안전하게 만들 겁니다. 제 사건이 알려져 업계 동료들이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한겨레 기사
기자 최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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