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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는 신기루!

cinema
2002년 08월 27일 05시 33분 33초 4065 10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은 분명 남다른 시선의 소유자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남들과 다른 오아시스이다.
얼핏 봐서는 그가 말하는 오아시스에서 비옥한 땅, 생명의 물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사막의 연장일 뿐이요, 오히려 사막보다 더한 척박함과 외로움만 보일 따름이다.
하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말하는 오아시스에 귀를 귀울이면, 여지껏 지독한 사막이라고 믿어왔던 그곳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순결한 오아시스였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세상이 보지 못하고, 세상이 지나친 오아시스를 보듬는 그의 천재적 작가성에 고개를 떨군다.

분명 오아시스는 놀라운 영화다.
영화라는 장르가 가져다주는 현실세계에 대한 판타지를 철저히 타파하고, 추잡하고 징그러운 현실의 마지막 한 꺼풀마저 남겨두지 않는 그의 배짱과 용기는 잔잔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오아시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아시스가 불편했다. 아무래도 불편함을 지울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이 의도한 불편함 이상의 불편함이 나를 괴롭힌다.
역시 내가 스크린에서 바라는 것은 순진한 판타지이다.

지하철 출구계단을 지날 때 마다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추하게 꺽인 손들을 외면하는 내 모습을 스크린 안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삶의 한켠에도 여전히 깨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계시를 간절히 원한다.

차라리 다큐멘터리였다면...
다큐멘터리도 픽션이거늘, 오아시스가 논픽션임을 바라는 것은 순진한 기대였을까?

오아시스는 몸서리 처질 정도로 잘 짜여진 극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초반부의 순진한 가면을 벗으며 드러나는 후반부의 치밀한 극의 구조에 정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지독하다. 지독하리만치 계산적이다. 캐릭터 역시 필요에 따라 똑똑해지고 덜떨어지는 등 그의 산술에는 영화화법의 만능술사를 뛰어넘는 날까로움이 있다.
그의 날카로운 산술 앞에서 자신이 의도한 대로 요리조리 관객을 가지고 노는 것 같다는 언짢음을 피할 수 없었다.  
관객을 좌지우지하는 천재성 이면에는 관객의 위에 서고자 하는 도도함이 느껴져 또 한번 불편했다.

공주가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판타지에서는 정말이지 확 깼다.
도대체 어떤 의도에서 그런 배짱을 부렸는지 모를 일이다.
환상을 깨고 싶어서일까? 영화라는 현실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최고의 판타지였을까?

그의 화법엔 선생님의 가르침 같은 게 느껴진다.
배움을 강요하는 듯한 그의 연출은 학생시절을 저주한 나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맞부디쳤다.

'나는 매일 이곳에서 맨손체조도 하고, 탁구도 치고, 물구나무서기도 하고...'

그가 말하면 감옥도 낙원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가 말하는 낙원에 동의할 수 없다!
분명 그가 말하는 오아시스는 현실이 아니다.
그의 오아시스는 또 다른 신기루의 하나일 뿐이다!

그의 오아시스에 귀 기울였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을 지금과 다르게 볼 수 있다며 자위하긴 싫다.
그의 오아시스가 세속의 나를 씻어 주리라 바라기는 더더욱 싫다.
오아시스의 감동에 젖어 거울에 비친 추한 내 모습을 외면하기도 싫다.

오아시스는 없다. 신기루만 있을 따름이다.

그의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나 변하지 않은 사실 하나, 그의 다음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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