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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와 원작 "오픈유어아이즈"...

cinema
2002년 01월 13일 18시 24분 44초 7884 1
오픈유어아이즈(Abre Los Ojos / Open Your Eyes)와 바닐라 스카이(Vanilla Sky)

"바닐라 스카이"라는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던 것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오픈유어아이즈"의 리메이크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영화를 봤다.

무지에서 시작해서 그런 지 영화의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
몇 몇 이들은 이미 "야곱의 사다리" 등에서 다뤘던 이야기로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 전개 도중 등장하는 또 다른 공간의 인물들,
로맨스와 스릴러를 접목시킨 구조적 유연함,
가상현실과 냉동인간을 소재로 차용한 점 등이 매우 기발하게 느껴졌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한 마이클 루브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새롭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엮었는가가 아닐까?
이 영화의 이야기를 새로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문제는 참신함이다.
여러 장르의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엮어 놓은 이 영화의 이야기는 충분히 참신하고 세련되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텅빈 뉴욕 거리...
혼란에 빠져 그 거리를 달려가는 데이빗의 모습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혼잡한 도시가 텅비어 버린 듯한 느낌, 나 역시 가끔 이런 느낌에 빠져들곤 했다. 그 장면은 마치 내 안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펼쳐놓은 듯한 묘한 전율을 주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장면의 촬영을 위해 뉴욕 한복판을 몇 십 블록씩 완전히 통제하고 촬영했다고 하더라.
정말 부러운 촬영여건이다.
서울은 한 골목만 막아도 여기저기서 상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히트"를 볼 때도 제일 부러운 것은 도심총격전 시퀀스였다.
얼핏 보아도 고층건물들이 들어선 도심의 중심가 같은 곳에서 대형 액션씬을 펼쳐내고 있는 그들의 촬영여건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또 이야기가 샜다.

"바닐라 스카이"는 초반엔 말랑말랑한 사랑의 감정을 실어 주다가 곧 혼돈스런 긴장감을 안겨 주었고, 결말엔 묵직한 철학을 던져 주었다.

가끔씩 나는 도로를 건널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도로를 건넌다, 무사히.
하지만, 사실 나는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여 죽었다.
뒤를 돌아보면 차에 치여 두 동각나 길바닥에 널부러진 내 시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볼 수 없다.
죽음과 직면하는 끔직한 공포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차에 치이는 순간 영혼이 되어 빠져나온 허상일 뿐이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길을 건너왔지만, 나의 실체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식어가고 있다.
뒤만 돌아보면 알 수 있지만, 나는 결코 뒤돌아볼 수 없다. 결코...
결국 이후의 삶은 다만 상상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땐 도로를 건너고 나서 눈을 질끔 깜고 뒤를 돌아보곤 한다.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바닐라 스카이"는 평소 내가 느끼고 있던 이런 망상을 정리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영화였다.
그래서 더욱 재밌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에 대한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 "오픈유어아이즈"를 봤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만약 "바닐라스카이"를 보지 않고, "오픈유어아이즈"를 보았다면, 지금의 감흥보다 더 큰 감흥에 사로잡혔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헐리우드 베테랑들에 의해 이미 매끄럽게 다듬어진 리메이크작을 본 이후라 그런지 원작이 너무도 거칠게만 느껴졌다.
이야기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고, 이야기 이외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리메이크작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야기를 끌어 가는 설정들 조차도 리메이크작보다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거칠고 저돌적인 이야기전개가 매력이라면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어쨌든 분명한 것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천재다!
특히 공포에 관해서는 히치콕을 앞지를 사람이다.
그가 선사하는 공포는 섬뜩하고 우스꽝스럽다. 매우 재미있다. 나는 그의 공포를 사랑한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vincent
2002.01.14 02:12
뭐가 더 재미있는가 보다..<오픈 유어 아이즈>를 본 후에 본 <바닐라 스카이>가 더 실망스러울까, <바닐라..>를 본 후에 본 <오픈..>이 더 실망스러울까..가 궁금해지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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