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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cinema
2002년 01월 04일 13시 25분 18초 4725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Harry Potter And The Chamber Of Secrets)

이 글을 읽기전에 "두사부일체"에 대한 나의 영화감상을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이어진 상황이라 그 글을 읽지 않고서는 아래 감상문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

갑자기 중고등학교 때 유행하던 미로퍼즐 같은 만화책이 생각난다.
이 만화책은 일종의 인터렉티브 형식의 책이었는데, 내용을 읽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오고, 독자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선별적으로 페이지를 이동해 가며 나머지 분량을 읽게 되도록 구성된 책이었다.
예컨데, 한 참을 읽다보면 '당신은 000 했겠는가? 그렇다면 17페이지로, 아니라면 38페이지로' 같은 식이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두사부일체"의 감상문을 읽어보라고 건방을 떨었더니, 옛 생각이라는 샛길로 흐르고 말았다.

"두사부일체"의 감상문에 이어,
그렇게 꿀꿀한 맘으로 해운대 숙소로 향하는 도중, 느닷없이 연출부 일행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린 지금 서면에 와 있다. 영화를 볼 생각인데, 한 편 더 보지 않겠느냐?'
뭐 이 비슷한 내용으로 나를 꼬시는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해리포토와 마법사의 돌]이라면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슬쩍 떠보니 별로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는 대답이 들려왔다.
세상은 바라는 대로 흘러간다고 했던가? 너무나 신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서면으로 거슬러 갔다.
좀 전엔 롯데시네마였지만, 이번엔 서면 까르푸에 위치한 CGV12란다.
역시 부산은 한국 제2의 영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롯데시네마, 서면CGV12는 물론, 밀리오레에 위치한 메가박스까지...
한국의 대표 멀티플렉스는 모두 갖춘 명실공히 제2의 영화소비도시가 바로 부산 아니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부산을 사랑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사랑하고, 서면의 밀면도 사랑하고, 부산의 한 선배를 사랑하고, 부산의 한 여인을 사랑한다, 아니 사랑했다. ㅡㅡ;

택시는 거의 빠듯한 시간에 나를 떨어뜨렸다.
서둘러 극장으로 올라가니 정작 나를 불렀던 일행이 어디서 헤매이고 있었다.
감격의 재회를 한 우리는 초스피드로 상영관으로 향했고, 장내에는 꿈의 프로젝트,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예고편이 한참이었다.
배워도 한참 배워야 할 그들의 상술이란...

눈으로 밟아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흥미로움과 실망스러움을 동시에 간직한 영화였다.
전세계를 흥분하게 했던 J.K. 롤링의 깜직한 상상력이 유치하면서도 시종일관 흥미로왔다.
동심의 향수에 굶주린 어른들을 흥분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영화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솔솔한 재미를 안겨주었다.
크리스 콜럼버스의 안정된 연출력은 비록 아동용 영화에서지만 훌륭히 제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나 그 밖의 전체적인 짜임새가 성숙된 연출가에 의해 견고히 구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수효과도 매우 흥미로왔다.

실망스러웠던 것은 스토리라인.
이건 마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이야기구조를 발단-결말로 끝내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말로 치닫기 바로 이전까지의 모든 일들은 그저 '해리포터에 관한 대서사시'를 시작하기 전에 주어지는 설정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시침이 뚝 떼고, 결말을 맺어버리고 있다.
이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확실히 가족용(이라기 보다는 아동용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영화라 유치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야기의 깊이가 없음은 물론이요, 작위적인 영웅주의에, 불멸의 주인공만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은 '내용이 복잡하다, 원작을 읽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투덜됐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어렵거나 복잡하지는 않았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 것이다.
그 어렵다는 "메멘토"도 전혀 어렵지 않게, 때론 쉽게 본 나 아닌가? ^^;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나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이 영화를 볼 바엔 "두사부일체"를 보겠다고 중얼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사부일체"를 보고 그토록 실망했던 것은 한국영화에 대한 나의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제 헐리우드 영화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만족스런, 혹은 감동스런 헐리우드 영화를 본 지가 벌써 몇 년째인가?
"해리포토와 마법사의 돌"을 보고 난 뒤, 숙소로 향한 나는 그들의 몰락을 안타깝게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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