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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갔다...

cinema
2001년 10월 10일 05시 07분 50초 3287 6 10
이 글은 시사회를 보고 쓴 글이에요.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글을 뒤늦게 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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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한 편으로 서정적 영상시인으로 입지를 굳힌 허진호 감독의 두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았다.

완성되기도 전에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화제를 일으켰고, 당시 최고의 인기배우 이영애와 유지태를 캐스팅하여 다시한번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 영화를 보았다. ^^;

봄~날~은 간~다.

영화속 상우의 할머니가 창(唱)을 하듯 읖조리는 이 대사에는 영화가 담고자 하는 모든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하루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아침인가 싶더니 어느새 저녁이고, 세상이 잠든 밤을 지내면 아침을 밝히는 해가 떠오른다.
하루하루가 모여 달이 되고 달이 모여 년이 된다.

계절은 또한 어떠한가?
꿈틀꿈틀 만물이 태동하는 봄은 작열하는 태양과 나른한 일상이 어우러지는 여름으로 탈피하고, 여름은 풍성한 열매와 넉넉한 마음이 깃든 가을로 바통을 넘겨준다. 그리곤 1년을 정리하듯 시리고 아픈 휴식의 겨울이 찾아온다. 하지만 겨울도 잠깐, 어느새 봄날은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는다.

봄날은 간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스님의 깨달음처럼 그저 '봄날은 간다.'
누가 말릴 것도 없고 재촉할 것도 없이 봄날은 간다.
봄날이 가도 슬프지 않은 것은 여름, 가을, 겨울 지나 어김없이 봄날은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한번 지나간 '그 봄날'은 결코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세상의 이치 때문이다.

이처럼 '봄날은 간다.'라는 짧지만, 깊은 문장의 속뜻을 설명하듯 영화속 인물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아쉬워하고 또 희망을 갔는다.

영화는 '봄날은 간다'라는 평범하면서도 평범치 않은 서술을 하고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이 영화는 지루~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뭔가 재미 있고 흥미로운 일이다.
슬퍼도 좋고 웃겨도 좋고 무서워도 좋고 가슴 뜨거워도 좋다. 하지만, 가슴이 턱턱 막히는 이런 지루함은 아니다.
일상이 지리하다만은 극장에 가서까지 그 지리한 일상을 비춰 보고 싶지는 않다.
잠자기 전 혼자 조용히 명상에 잠기며 느끼고 싶은 감정을 강탈당한 느낌이었다.  
허진호 감독은 유난스럽지도 않고 얌전하지도 않은 일상과 사랑을 그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관객과의 지나친 거리유지로 자신의 화폭을 흐리고 말았다.

은수 역에 이영애를 캐스팅한 것 또한 불만이다.
이영애는 너무 예쁘다. 그처럼 예쁜 이혼녀가 현실속에 살아숨쉰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할머니 캐릭터나 아버지(박인환님), 고모 캐릭터(신신애님) 등도 '봄날은 간다'라는 큰 '틀'과 어울리지 않은 '살'들이었다.
극중 인물이 '사람들'이 아닌 '연기자'로 느껴지는 그 순간, 봄날은 갔다.
여지껏 한국영화에서 보았던 그 어떤 여자캐릭터보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은수는, 그래서 빛이 바랬다.

이 영화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일상 구현의 마술사, 홍상수 감독은 '나는 아니오~'라며 능청과 너스레를 떨며 우리의 일상을 기가 막히게 잡아낸다.
그가 그려내는 일상을 보고 있으려면 맨몸으로 거리에 내몰린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럽고 쑥쓰럽기 그지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몇 몇 장면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대부분은 귀엽고 가증스런 비현실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또한 허진호 감독이 잡아내는 사랑과 일상은 그럴 듯 함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의 그것과는 다른 '짜가' 냄새가 난다.
왠지 무게를 잡는 것 같아 더욱 가볍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렇게 느껴진데는 유지태 특유?의 연기도 한몫했다.
어차피 영화는 '짜가'다. '짜가'를 짜가로 봐달라고 솔직히 말하는 것과 '짜가'를 '진짜'처럼 봐달라고 때를 쓰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가 잡아내는 일상은 또한 홍상수 감독의 그것(왜 자꾸 홍상수 감독과 비교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ㅡㅡ+)보다 날까롭거나 재치있거나 놀랍거나 독특하지 않다.

한마디로 잘 짜여진 드라마도 각본 없는 드라마도 아닌 정체성을 상실한 영화였다.

허진호 감독의 생때를 받아주기엔 요즘의 내가 너무 피곤한가 보다.

마지막까지 그의 영화에 실망한 이유는 작가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오직 남성뿐이라는데 있다.
솔직히 나는 영화 속 은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함께하는 두려움을 그야말로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전라의 여인이 뿜어내는 원초적인 여체의 아름다움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은수의 최후는 어떠했나?

상우를 남겨둔 채 멀어져가는 은수는 촛점이 나가서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남아 있는 상우는 마지막 오버로 멋을 '유지한 모양(유지태?)'이다.
그리곤 은수는 없다.
왜?
은수는 어디로 갔나?
어디서 누구랑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정말 궁금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대신 잔뜩 겉멋이 든 자연을 배경으로 복실복실한 마이크의 두 깃발을 꼽고 알지못할 미소를 짓고 있는 유지방 풍부한? 상우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미소짓는 상우의 모습이 정지되고 곧 화면은 어두워진다.
그리곤 '감독 허진호'라는 자막이 뜬다.
이 영화의 제목을 "날 보러 와요."로 바꾸면 어떨까?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과 제목이 겹치지만 않다면 정말이지 "날 보러 와요"로 바꾸면 '딱'이겠다.

옳다.
봄날은 간다. 그러니 봄날은 갔다!!!

참고로 이 영화의 컷수는 178(+-10컷)이었다.

용꼬리 : 너무 오버해서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에게까지 누를 끼쳤습니다. 어차피 줄거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닌 것 같으니... 죄송합니다. ㅡㅡ=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vincent
2001.10.11 02:47
맞아요, 님의 글대로, 날카롭거나 재치있거나 놀랍거나 독특하지 않은데..
.. 그런데.. 서글프게 재미났답니다. --;;
홍상수는 홍상수식으로, 허진호는 허진호식으로. ^^
yyjjss10
2001.10.13 03:31
컷수 세셨나요...아님 습관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정서의 영화스타일이라 70점정도는 주고 싶던데....
cinema
글쓴이
2001.10.13 03:51
서글프게 재밌다? 아직 공력이 부족한 탓인지 잘 모르겠네요... ^^;
저는 언젠가부터 영화를 보면서 컷수를 세고 있습니다.(모두들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리지만, 저는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컷수는 178컷을 왔다갔다 하더군요... ^^;
vincent
2001.10.13 04:04
아픈 영화를 두고 그냥 재미있네, 라고 말하기 어쩐지 미안해져서요.
은수 그 여자가 이해되고, 상우가 부담스럽게 측은해서..
그렇게 공감이 되서 서글픈 그런 느낌..
cinema
글쓴이
2001.10.15 03:07
문제는 공감입니다. 개인의 유사기억의이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어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저에게도 유사기억이 있었지만, 공감을 하기엔 역쉬 역부족이었슴다. ^^;
so-simin
2001.11.29 00:25
그 영화재미있다는 표현엔 여러가지 의미가 들어 있지요.웃겨서 재미있을수도 있고 슬퍼서 재미있을 때도 있고 가슴뭉클해져서 재미있다고 할수도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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