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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 베티>와 <푸른 안개>

vincent
2001년 06월 01일 01시 29분 34초 5447 7

며칠 전 송승환이 진행하는 시사난타에서 드라마 <푸른 안개>를 놓고
'당신이 윤성재(이경영)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제법 전문가 연하는 패널들과 어린 아가씨에게 끌려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중년 남자를 연기했던 이경영과 그 부인 역을 맡았던 김미숙이 나왔다.
처음에, 그들은 제법 담담하게 논의를 시작했으나, 점차 배웠다는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드라마 속 한 인물의 편이 되다가 급기야는 자기 얘기처럼
각자의 입장을 옹호하느라 법썩을 떨었다.
압권이었던 것은 막판에 걸려온 두 통의 시청자 전화였는데,
첫번째 남자는 자기 얘기는 아니라고 시작했다가 점차 모두에게 그 자신도
한 번쯤 바람(?)의 전력이 있었을거라는 강한 심증을 남긴 채 통화를 마감했고,
두번째 남자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고, 지금은 이혼했다며 윤성재와 비슷한
입장이라는걸 시인하다가 급기야 드라마속 윤성재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내가..."라고 말머리를 꺼내는, 현실의 자신과 드라마속 설득력 있는 윤성재를
혼동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던져준 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통화가 끊겼다.

자신들이 모두 드라마속 윤성재처럼 불쌍한 굴레를 짊어지고 사는거라고
착각하는 남자들 때문에 나는, 시종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연기자를 길에서 만나면 욕하고 흘겨보고 심지어
한 대 치고 도망간다는 아줌마들을 보며,
"하여간 유치해. 드라마는 드라마지 그걸 갖고..." 이렇게 이죽였던
멀쩡한 남자들이 대신 그 자리에 앉는 순간이었다.
드라마 속 윤성재와 자신의 환경이 절대 등치될 수 없는데도
남자들이 그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욕망의 문제가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대상을 점 찍고 그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드라마 속에서 자기 욕망의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아내는데 성공했으므로
그들의 '동화'는 다소 불순해보인다.
이런 불순함은 송승환의 시사난타 중간에 끼어든 포장마차 토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들의 모든 남자를 볼모로 가장 크게 얘기하는 지점은
중년남성의 가족과 사회에서의 위치에서 오는 압박감이나 아픔이 아니라
대다수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아리땁고 어린 여자가 다가오면 넘어갈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결국... 핵심은 윤성재의 환경이 아니라 윤성재에게 다가온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 비해 드라마와 현실을 착각해서 무모한 도정에 나서는
우리의 베티(르네 젤뤼거)는 바보스럽지만 차라리 순수하다.
그녀는 드라마에 미칠 수 밖에 없는 한심하고 갑갑한 현실에서 출발해서
드라마속 주인공과 촬영지가 있는, (게다가 실제로) 드라마안으로 들어와서야
진짜 현실과 맞닥뜨릴 기회를 얻게 된다.
그녀는 드라마속 욕망에 전염되기 보다는 드라마속에서 빠져 나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풋풋한 르네 젤뤼거의 미소는, 사랑스럽다.
보편적 소재에서 출발했으나 비범하게 꼬아가는 뛰어난 각본도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작년 칸느영화제 각본상 수상.

추신. 별점 매기기는 피하고 싶다.
별 몇 개로 영화의 감흥을 나눌 수 있다는건,
내겐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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