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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구성의 타이밍은...

cinema
2001년 05월 08일 23시 39분 15초 5661 8 1
저는 길지 않은 충무로 경험에 세 작품이나 보류/취소되는 경험을 한 제작, 연출부 스텝입니다.

요즘 영진위 자유게시판이나 다음카페 비둘기둥지, 그리고 이곳 필름메이커를 통해서 스텝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여러가지 고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지껏 전근대적 제작시스템 아래 다수의 영화인력들이 피해를 보았고, 그로 인해 그들의 원대한 이상이 현실이라는 높은 장벽 아래에 초라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충무로에서는 불합리한 제작시스템이 자행되고 있어 영화인력들의 주린 배는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악습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나마 기술 스텝들은 연출/제작부 스텝들에 비해 나은 편입니다. 물론 그들도 힘들지만,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으로만 따진다면(일반적으로 연출부/제작부들은 사전제작준비과정부터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장시간 참여하는데 비해 기술스텝들은 촬영 기간에만 참여하는 것이 현실임을 감안한 발언입니다.) 연출부/제작부들이 겪는 물질적 고통은 실로 비참하기 이로 말할 때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들 자신의 책임 역시 배제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관행이 하루, 이틀 전의 일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자행되고 있는 악습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복 되풀이하는 이들 역시 젊고 혈기왕성했을 때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불합리한 현실에 분개하고 탄식하던 이였슴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변해가지 않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자신에 대한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기성세대와 닮아가는 내 자신의 모습에 몸서리치게 놀라기도 합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스텝들에 대한 불합리한 대접에 분개하고 처우개선을 부르짓기 이전에 조감독, 제작실/부장 급들의 인력이 너무 일찍 스텝들을 꾸리는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구인 개시판만 봐도 시나리오를 함께 써 보자며 연출부를 구한다는 둥, 곧 들어갈 작품으로 연출부를 구한다는 등의 글들이 많습니다. (연출부가 시나리오를 왜 씁니까? 도대체... 크레딧에 '각색'이라고 이름을 올려줍니까? 아님, 각색료를 십원이라도 더 챙겨줍니까? 돈을 주고 각색작가랑 일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그 영화들 중 어떤 영화도 6개월 이내에 크래크인 되는 영화는 없습니다.

한국영화가 활기를 띠며 전문투자자본들이 앞다투어 들어와서 영화판에 돈이 넘친다고는 하지만, 실상 제작되는 작품의 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투자자들은 자신의 돈을 되찾기 위해, 나아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흥행보증수표인 주연배우의 지명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충무로의 제작자들 역시 이러한 투자자본의 요구와 맞서는 어떤 대안도 없이 그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확실한 캐스팅을 제 1 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판에 배우가 없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지 않은 정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이다 보니 시나리오가 좋아도, 감독이나 제작사가 탄탄하여도 배우 캐스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실제적으로 계약 등의 자본의 흐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하지만, 조감독급의 스텝들은(바로 우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작사의 논리에 부응하여, 혹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끝이 보이지도 않는 작품의 스텝들을 서둘러 구성하려고만 합니다. 바로 무임금 막노동의 시작입니다.

당연히 구성된 연출부/제작부들은 처음 1개월만 빤짝 바쁘다가 6개월, 1년씩 하릴 없이 사무실만 왔다갔다...
결국 불합리한 충무로 현실에 분개하고 영화판을 떠나기도 하는 불상사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감독급 정도 되면 영화가 들어갈 지 아닐 지에 대한 감이 섭니다.
그리고 밑에 사람들이 하는 일쯤은 자신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6개월에서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준비를 하여도 '조감독' 혹은 '제작실/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금전적 보상은 물론이요(그나마도 부족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 스텝들은 정말이지 차비도 되지 못하는 푼돈을 받습니다, 아니 직접 당신의 손으로 주지 않습니까?), 작품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되지만, 아래 스텝들은 그야말로 발이 묵힌 채로 바보가 되고 맙니다...

자신이 당했다고, 후배들에게까지 그 불합리한 희생을 강요하는 건가요?

제발, 부디, 간곡하게 부탁하건대 우리의 능력있고, 재능있는 젊은 스텝들의 발을 붙들어 매는 어리석은 짓을 이제는 그만둡시다!!!

확실할 때, 아니 적어도 가능성이 보일 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일을 시작합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이제 막 영화일을 시작하는 꿈 많고 혈기 넘치는 이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겨 주지 맙시다.
그리고 한, 두 작품 끝낸 이들이 더 이상 이 눈치, 저 눈치 봐 가며 작품 선택에 천운을 거는 무리수를 두도록 요구하지 맙시다.

부탁합니다...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JEDI
2001.05.09 00:32
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 역시도 1년넘게 어떤 작품에 매달려있다가 그 작품이 엎어지면서 단돈 10돈도 받기는 커녕, 시간버리고..왔다갔다 차비 바리고.. 그 바람에 다른 작품 몇개나 못하게 되고.. 인생전체를 통해 봐고 적지않은 데미지를 입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그냥 하는 생각이기는 하지만..그런 일만 없었어도 벌써 입봉했겠다..는 생각도 들고..그렇다고 누구 원망할 사람도 없고..누구에게 피해보상 하라고 할 대상도 없습니다..모두가 피해자들 뿐이니까요..

저 역시.. 감독들이 조감독을 뽑을때..혹은 조감독들이 연출부를 뽑을때..좀 더 신중하게..책임감을 가지고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합니다.
원칙적으로 계약부터 하고..출근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물론..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건 알지만..
계약 해봐야..몇푼 되지도 않는돈..그나마도 다 주는것도 아니고..나누어서 주는거..

이거 참 중요한 문제이고..시급한 문제입니다.
계약도 안해주고 일 시키는 관행은 분명히 없어져야 하고..그런 관행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있는 지금 충무로의 마인드도 변해야합니다.
필름메이커스 회원분들이라도... 계약하기전에 스탭을 뽑는..( 최소한, 수일내에 계약할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악행을 되풀이 하지 말아주실것을 바랍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변해야 시스템 전체가 변할수있습니다.
누가 변화시켜 주지 않습니다.

물론..어려움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경우들이 친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는 선배가 입봉하는데 도와달라고 한다... 이거 " 그영화 들어가는건지 어떤지도 모르잖아요.." 하면서 뿌리치기 힘듭니다.
또 그 영화가 엎어졌을떄.." 임금 달라"고 말할 상대조차도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결국..해결책은 조감독이나, 연출부를 구성하는 주체에서 좀 더 신중하게 그리고 책임감있게 사람을 구하고..그들에게 일을 시키고..해야 한다는거죠.

한국 영화판에서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를 지적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cjbeen
2001.08.25 05:29
반대로 얘기하면 인력이 넘쳐난다고 말 할 수 있을겁니다. 대한민국에 왜 이리도 영화 인력이 넘쳐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라면 왜 그리 많은 젊은이 들이 " 일만시켜주십시요" 하며 나서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또한 넘치는 인력에 반해 정형화된 스텝 제도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일 것입니다. 옛부터 신성한 권역이라고 여겨지던 학교 선생들조차 " 우리도 평범한 노동자다" 라고 외치며 교원노조를 설립했다. 하물며 정말 현장에서 개같이 일하는 스텝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 할 수 있는 마땅한 제도적인 발판이 없다는건 심각한 문제라고 하겠다. 전문화되고 체계적인 스텝제도 !! 영화 수익금이 런닝게런티를 받는 배우나 제작자 혹은 감독의 주머니에만 들어갈 것이 아니라 스텝들을 전문화 조직화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봐라! 쉬리를 찍은 강제규 감독은 엄청난 돈을 벌어 지금은 영화 외에 연예 entertainment 사업(연예인 management)에 까지 돈을 투자하는데 함께 했던 스텝들은 지금 어떤가?   


            


marlowe71
2001.05.09 03:05
절대적으루 찬성합니다.. 그거 여러 사람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wanie
2001.05.11 04:40
반성 많이 합니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군요..
trout
2001.05.19 02:08
밑에 누구 거느린다고 좋은 영화 나오나요 머? 나오나?
neptune4
2001.09.07 09:48
동감입니다.
yiph
2001.10.10 16:12
맞는 말 입니다! 전적으로 동감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능성이 보일때도 촬영에 들어갈수 있는 확율이10%도 채 않된다고 확신합니다.. 완벽한 시나리오와 펀딩이 확실히 됐을때 스텝구성을 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그러구도 못들어가는 영화도 있는데...
sebastian708
2001.10.28 19:24
처절히 동감입니다...
저도 지금있는 곳에서 길지는 않지만 연출부에서 지금은 조감독으로 있지만 시나리오 기획만 벌써 몇 번째하고 일만 복잡하게 벌려놓은 터라, 밑에 연출부원들이 불쌍하기도하고 나도 불쌍하기도하고...영화를 배우러 들어왔던 초심이 흔들릴려고 합니다. 이건 하나라도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데 여러개 벌려놓은 꼴이란...쩝 백문이 불여일견이듯이 기획만 백번하믄 뭘합니까 한 번이라라도 찍어봐야 뭐가 잘돼고 잘못됐는지 알거 아닙니까?...제가 뭐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감독의 횡포에 휘둘림을 당하면서 도 애써 참아보지만 제가 여기서 배울것은 단 한가지 입니다...난 저렇게 하지 말아야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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