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이라...

anonymous 2009.03.14 05:00:01
몇년간 영화 스탭으로 일을 해오다가 배가 고팠던 어느날...
우연히 방송국에서 일하는 대학 선배의 소개로 방송국 알바를 시작했다.
소위 바쁠때만 부르는 직원...

처음 방송국에 들어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함께 일은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지 않던 나로썬,
그들이 하는 고민, 작은 직책 사이에서 오가는 긴장감과 승진을 향한 기대와 노력, 배신감을 느끼는 것을 보면서
참 영화현장이랑은 다르구나 하면서도 '참, 여기는 회사지.' 라는 생각을 하니 한편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야간조를 맡았던 한 친구는 5년간 근속했으나 결국 주간근무로 옮기지 못했고,
결국은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 친구가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는 경험없는 낙하산이 내려앉았고,
어찌했던 간에 급할때만 와서 일을 도와주는 나에게는 모두가 최소한 겉으로라도 친절했고,
지금은 일에 잘 적응해서 흥미도 느끼고 보람도 느끼고,
영화가 아닌 드라마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도 있다.

그렇게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밥을 겨우 먹고 살 수 있었고,
영화에서 일하고 받지 못한 돈은 쌓여갔지만 처음부터 계약서 하나 받아들지 못한 내 잘못이라 여기고 잊어갔다.
그러던 사이 작년에 일했던 한 상업영화가 거대 국제 영화제에 초대된 소식을 보게되었고,
혹시나 하며 연락이 올까 기대를 하다가 결국 직접 연락해서 들은 말은,
"우리는 돈이 없고, 그때 받지 않았는데 왜 지금 와서 이러는지 참으로 곤란하다." 였다.
그래, 어차피 포기했었고, 기름값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그 영화사, 그 영화 만들때는 어차피 지지리 돈도 없었고,
나에게 돈을 약속할 때 부터 종이 한 장이라도 받아 놓아야 했었다.

아직 스탭으로 입지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나인지라, 어쩌다 상업이 들어오면 좋아라 가고,
약간의 돈을 벌어도 막아야 할 곳에 들이붓고 나면 남는 건 동전 몇개,
주로 독립영화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히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배고프니 알바도 뛰고, 대학원도 다니면서
하여간에 어떻게건 잘 살아보여고 아둥대고 있다.
어떨때는 내가 뭐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아직 서른이 되지는 않은 나이.
인맥이 좋아 상업영화에서 좋은 자리를 많이 얻어내는 친구가 부럽기도 하지만,
아직은 방송국에 아는 선배 있어 밥이라도 벌어먹고 사는게 어디냐고 생각해도 된다.


어제 방송국에서 꽤 좋은 조건으로 정식 직원 계약할 의사가 있냐는 제안이 왔다.
순간 가슴이 떨렸다.
그 돈이면 한 2년만 다녀도 생활비 쓰고 저축도 얼마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머리를 스쳐갔고,
나같은 알바생에게 "네가 일을 깔끔하게 잘해서 참 좋다." 라며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해주시는
상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도 고마웠다.
정말 감사합니다, 심사숙고하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 거기 취직해도 되나? 하고 고민하고 있다.
어제는 너무 기뻐서 시골집에 전화해서 자랑도 했는데,
지금은 나 결국 돈 벌려고 영화 포기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손으로는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착각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면서도,
우리 드라마도 영화 못지 않게 잘 만드는데 내가 왜 꼭 영화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잠시 했다.

나는 무엇인가?
아직 대학원 졸업도 1년이 남았으니 취직을 하려면 학업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뤄야 할 것이고,
취직을 하면 영화일이 들어와도 거절해야 할테니 영화와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뵙고 정중히 거절하고 그냥 알바만 하겠습니다 해야 하는것 아닌가 말이다.

고민으로 지새는 밤. 딱 오늘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