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을 기다리며
anonymous
2003.04.21 05:25:08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완벽한 시나리오, 죽이는 시나리오, 최고의 시나리오, 등등
그 말이 그 말인 찬사들을 덧붙인다.
작년 봄이었나, 절친한 작가가 입이 닳도록 찬사를 보내길래 어렵사리 구해 읽었다.
읽어보니 좋긴 좋았는데,
과연, 이게... 완벽한, 죽이는, 최고의...까지일까, 갸우뚱했었다.
물론, 정말 좋은 시나리오였다.
등장인물이 그렇게 많은데도 이야기의 축을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엄청난 핍진성이라니.
(공들인 시나리오는 뭐가 달라도 달라.)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읽고나서 혀를 내두를 때는
'작가' 정신의 가상함과 더불어
적절하게 (다시 말해, 은근하게) '상업성'을 품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나마 사람들이 '상업성'으로 밑줄그을 수 있는 코믹함이
원작인 연극 <날 보러와요>보다는 덜 한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실화다 보니, 범인이 안잡히는데다가
범인데 대해 섯불리 추측해서도 안되는 것 아닌가.
대체, 그 완벽한, 죽이는, 최고의...라는 평가가 나온 잣대가 뭔지 궁금했다.
시나리오를 읽는 이들이 '아무리 그래도 상업영화'라는
지점을 애써 지우고 읽은 것도 아닐텐데,
무엇이 그런 지점을 지워내고 싶을만큼 대단한 충격을 주었던걸까?
엄밀히 말해, (상업 영화로서) <살인의 추억>같은 시나리오는
봉준호가(혹은 봉준호같은 감독이) 아니라면 절대 엄두내지 못할,
아니, 섯불리 내면 안될 시나리오다.
(실화라는 점을 잠시 잠깐 논외로 하고)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범죄영화, 혹은 디텍티브 무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지능적인 연쇄살인범이 있다'라는 점만 빼면,
'성격과 배경이 판이한 두 형사가 짝패가 되어 수사를 한다'라는 점만 빼면,
어떤 규칙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범인과의 머리싸움에서 뭔가 대단한 역할을 해줄 것만 같은(같아 보였던)
서울에서 온 형사 서태윤이
'연쇄살인범'을 잡아낼만한 대단한 지적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골형사 박두만이 그의 무지함에 대한 답답함을 한 방에 날려줄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대단한 직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서태윤은 오히려 '무지'하고 '무식'한 다수에 물이 들며
박두만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나 <공공의 적>에서 익히
봐왔던 한국형 형사와 그닥 다르지 않다.(조금 다르긴 하다, 어쨌든 그는 시골형사니까)
조연들도 정말 이 영화만의 '번쩍하는 황홀한' 그런 인물들은 아니다.
형사들은 번번이 엉뚱한 용의자를 데려와 족치며,
범인은 번번이 코앞에서, 형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희생자를 내어놓곤 사라진다.
형사들이 잡은 힌트 또한 현장을 해석해 얻어낸 '살인의 규칙'이 아니며
때마다 형사들의 발목을 잡는건, 거창하게 존재론적인 회의가 아니다.
그들의 발목을 잡은 건 시대의 무지와 80년대라는 미친 시대가 만들어낸
공권력으로서의 자기 명찰이다.
그들은 범인과 대결하다 장렬하게 전사하지 못하고,
범인과 대결하다 뱃지를 반납하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범인과 대결하면서 폼을 잡지 못한다.
그들은 범인과 대결하면서 미쳐간다.
80년대가 미쳐갔듯이, 비극을 빤히 앞에두고도 어쩌지 못했던 우리가 미쳐갔듯이,
그들은 무지 때문에, 분노 때문에, 생존 때문에, 미쳐간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바로 이 지점에서,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는 영화가
그 외피와 정확하게 배반하는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찬사로서 축약한 단어들엔 마음이 안쏠리지만,
그들이 찬사를 보내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어진다.
이 시나리오가 매력을 가질 수 있는 건, 바로 이 규칙을 어기고 있다는 점,
(실화를 선택함으로써 더욱) 어길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매력은 '한국적'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게 아니라,
'연쇄살인'이라는 너무나 영화적인 소재 때문에
'실화인, 여전히 미제로 남은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사건'에 도전장을 내민게 아니라는,
봉준호 감독의 특출난(?) '진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 시대를 영화를 읽는 코드로 배치하기보단
'향수'라는 너그러운 감정으로 활용해 관객들에게 점수를 얻고자하는
일단의 영화들이 있었는데,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야 특정한 시대가 영화 전체와 호흡하고,
인물들과 호흡하고, 공간과 호흡하는
어찌보면 당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H>와 같은 영화들이, 혹은 '연쇄살인'을 소재로 채택해 만들어지고 있는
몇몇 영화들이 어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 온
범인과 형사들이 우리와 영 상관 없는 사건들을 벌이고, 쫓고 있는 것 같은
생경함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패한(혹은 실패할 것 같은) 우..에서 비껴나서
범인이 왜, 어떻게 그 사건을 저질렀나,가 아니라
왜 우리가 범인을 잡을 수 없었나,를 돌이켜보는
아예 맥이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고자 했으니
이 시나리오는 소재가 가져다주는 약점을 무기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국적'이라는 말로 은근슬쩍 찬사를 얼버무리는데
적어도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한국적'이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고는 생각 못했다.
아니, '한국적'이라는 말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시대의 정서를 담아내고, 공간을 시골로 설정하고(실화니까),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 그 것이 '한국적'인 것인가.
(<파고>가 미네소타주의 썰렁한 설경을 배경으로 했으니, 그건
'미네소타주적'인 것인가?)
오히려 지독하게 '핍진성'이 있다는게 정확할 것이다.
(그것과 '한국적'이라는 말이 같다고 한다면, 뭐 할 말 없겠지만.)
그리고, 범인을 못잡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한 소재를 가진
다른 영화들과 반대 방향에 서 있다는 점에서,
그 독특한 개성에서 이 시나리오가 매력이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이 영화가 기다려진다.
어떤 사람들은 한 영화사의 성패가 걸렸다고도 하고,
이런 영화가 안되면 관객들을 의심해봐야한다고도 한다.
관객들을 미워한 적은 많지만 의심해본 적은 없다.
생각해보라, 그들에겐 늘 이유가 있다.
이번엔 그들이 어떤 이유로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낼까.
난 관객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영화에 화답할 것만 같다.
지금쯤... 관객들은 제대로 만들어진 영화에 굶주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