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 정기 상영회 '반딧불'

anonymous 2002.10.16 00:25:52


안녕하세요. 인권영화 정기상영회 반딧불을 준비하는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9월 7일에 반딧불이 불을 밝혔습니다.
이제 첫 시작이라 운영에 미숙한 점도 많았지만 격려해 주신 많은 관객들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습니다.
지난달에 이어 10월 17일에 아티카의 유령들로 여러분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옥의 폭동 -인간성 회복을 위한 마지막 절규"란 주제로 서준식 선생님께서 영화 상영 전에 강연하실 예정이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10월 상영회

상영작 : 아티카의 유령들 Ghosts of Attica
날   짜 : 10월 17일 목요일
시   간 : 7시 30분
장   소 : 일주아트하우스 아트큐브 (문의전화 : 02-2002-7777)
주   관 : 인권운동사랑방 (문의전화 : 02-741-2407)
    궁금하시거나 문의사항은 전화 대신 가급적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HRNS@hitel.net

이번 상영회 시작 전에는 서준식 선생님께서 "감옥의 폭동 -인간성 회복을 위한 마지막 절규"란 주제로 강연하실 예정입니다.
영국이나 미국,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의 중요한 감옥폭동을 소개하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간단하게 평가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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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영작 소개

아티카의 유령들 Ghosts of Attica

미국/2001/브레드 리츠텐스테인 Brad Lichtenstein/90분/다큐멘터리

줄거리
아티카는 워터게이트, 베트남 전쟁과 함께 미국 근대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다. 1971년 아티카 감옥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록펠러 정부는 유래없는 폭력을 사용하여 4일만에 반란을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29명의 재소자와 교도관 10명이 목숨을 잃고 무려 1600여개 이상의 총알이 사용되었다. 이 영화는 당시 목격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감옥내 반란과 진압 과정 및 숨겨진 과거의 진실을 밝혀내고 미국인의 가슴 깊숙히 숨겨져 있는 아픔을 드러낸다. 또한 이 일로 인해 생존자들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도 보여준다.
인권해설
1971년 9월 9일 미국 뉴욕주 버팔로 근처에 있는 아티카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40명에 가까운 교도관들을 인질로 잡고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주정부와의 협상을 시도한다. 이들이 내건 요구조건은 감옥 내 처우개선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정치적 자유, 더 많은 교육 및 재활(rehabilitation) 프로그램, 그리고 타협이 성사된 후 교도관들로 부터의 보복과 기소의 면제 등 28가지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요구조건이 후에 아티카 교도소 반란의 원인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의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아티카 교도소의 반란이 반전운동과 같은 당시의 자유주의 인권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도소 당국에 대한 재소자들의 불만이나 요구사항이 처음부터 이렇게 거창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반란 1년전인 1970년 여름부터 이미 수차례 재소자들이 1일당 30센트에 불과한 저임금과 교도소내 사용품(私用品)의 높은 가격, 또는 수용인원의 40%를 초과하는 과밀수용이나 교도관들의 구타 등 각종 교도소내 처우에 대해 청원을 제기하거나 시위를 해 왔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던 것이 마침내 1971년 여름 몇몇 재소자들에 의해 임금인상과 향상된 의료처우, 검열의 금지 등을 포함한 요구조건이 제시되기에 이르는데, 이 청원서가 재소자들 사이를 떠돌고 있을 때, 캘리포니아에서 유명한 감옥 인권운동가 죠지 잭슨(George Jackson)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인해 고조된 교도소의 긴장 분위기는 마침내 2주일 후 반란의 발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교도소를 장악한 재소자들의 정비된 요구조건은, 그러나 당시 뉴욕주 지사 임기를 1년도 남겨놓고 있지 않았던 보수정객, 록펠러(Rockefeller)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소수자들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아프리칸 어메리칸(African-American)과 푸에르토리칸(Puerto Rican)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수용자들의 반인종차별적, 정치적 요구들은 주지사로 하여금 단시일만의 강경진압을 택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협상은 4일만에 결렬되고 주정부 군대의 무차별적인 소내진입이 진행된다. 마치 '칠면조 사냥'과 같이 불필요할 정도로 강경하게 진행된 이 진압과정에서 29명의 재소자와 10명의 교도관들이 군대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반란이 진압된 후 수개월간에는 다시 교도관들의 재소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 폭행이 자행된다. 이 폭행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1971년 12월에는 연방법원이 더 이상의 학대행위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발할 정도였다. 이러한 탓으로 아티카 교도소는 미국 내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해 가혹한 처우를 하는 교도소의 상징처럼 여겨져 오기도 했다.

반란이 발발한 지 30년, 지금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열악한 교도소내 처우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미 의회나 몇몇 주정부들이 이를 개선하는 입법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인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티카 교도소의 반란은 미국내 교도소의 증설과 감시체제의 전자화 등 '교도소의 현대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진압의 책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책임자는 끝내 가려지지 않고 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혀 들어가는 인상이다. 1974년에 제기된 손해배상소송은 30년 동안이나 그 시비를 가리지 못하다가 결국 작년에 뉴욕주 정부가 8백만 달러를 배상하기로 하는 중재안에 도달했다. 그러나 주정부는 이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의 많은 피해자들은 이미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자유주의 인권국가의 대명사를 자처해 온 미국, 그 한가운데서 벌어진 아티카 교도소의 반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왔지만, 분명한 것은 아티카 교도소가 미국 교도소의 열악한 조건과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교도소와 소수자들은 어떠한가? 곱씹어볼 일이다.

최정학(서울대 법학 박사과정)  

  상영장 오는 길

  
  
▶지하철 :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 (신촌방향 150미터)
▶버스 : 3-1, 5-1, 30, 30-1, 123, 129, 131, 134, 142-1, 146, 150, 152, 153, 154, 155, 156, 157, 158-2, 158-3, 159, 302, 542
▶좌석 : 59, 61-1, 63-1, 72, 72-2, 959, 1002, 1003 (광화문 정류장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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