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23살이 되는 연기자가 꿈인 한 젊은이의 고민 겸 작은 인생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기자를 꿈꾸고 있는 내년에 23살이 되는 한 청년입니다.
예전부터 필름메이커스 사이트는 알고있었지만, 알고만 있었던지 1년정도 만에 첫 글을 올리게 됩니다.
제가 22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연기자를 꿈꾸었던 이유와
연기자가 되고 싶은 제가 앞으로의 길에 있어 여기계신 여러분께 조언을 구하고자 하오니
그냥 짧은 소설 하나 읽는다 생각하시고, 저의 고민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사실 사생아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없다기보다는, 아버지가 절 버렸죠. 원래 어머니께서는 서울에서 아주 잘나가는 레코드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저를 임신하시고, 도망 가버린 아버지를 찾느라 흥신소에 전 재산을 갖다 바치게 되지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란 사람을 찾았습니다만, 아버지란 사람의 집안에서는 저를 낙태하거나 홀트 아동 복지회에 보내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냥 저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시고, 지금 충무로 동국대학교 옆에 있는 제일병원이란 곳에서 절 낳으시고 제가 2살때, 외가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가 사람들은 저희 어머니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습니다.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는데요. 물론 외할머니께서는 저를 잘 보살펴주셨습니다만, 다른 외가사람들이 집에 오면, 저와 엄마는 집구석 3평도 안 되는 골방에 문 닫고 죄인처럼 틀어박혀있어야 하거나, 서울에서 이모와 사촌형제들이 내려오면, 외할머니 집이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집에서 나와서 여관에서 자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먹여 살리시기 위해 그때부터 보험설계사(속된 말로는 보험쟁이라고들 하지요.) 일을 하셨지만,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다시피 그일이 물론 성공하면 잘 벌지만, 대다수가 정말 하루 벌어 입에 겨우 풀칠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보낼 돈도 없어서 한곳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여러 군데 떠돌다가 겨우겨우 7살때 유치원은 다행히 마치게 됩니다. 어쨌든 그래서 어렸을 땐 친구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어머니께서도 저를 너무 감싸려고만 하셔서(이게 나중에 중요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항상 밖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제 꿈과의 첫 인연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기억하는 TV 작품은 판관 포청천과 동방불패2로 기억합니다. 제가 5살쯤에 본 것 같은데, 당시에 그 작품은 저에게는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하긴 5살 때부터 개 작두에 뿌려지는 피를 봤으니......) 나쁜 의미가 아니라 너무 멋있었죠. 그래서 막연하지만 그 세계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TV에서 해주는 드라마와 만화, 예능프로는 저를 더욱 더 TV 속세계에 더욱 더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TV가 제 인생에서 진정한 첫 친구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언젠가 내가 정말 저 TV속 드라마나 영화, 만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소망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연기자를 꿈꾸게 된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와 중1때 극심한 왕따와 괴롭힘에 시달리게 됩니다. 학창시절 때는 뚱뚱하고, 또 힘도 약했던 탓에 주위에서 놀림도 많이 받았고, 힘센 친구들에게 많이 맞고 다니는게 일상이었습니다. 그것이 중학교 1학년 때 절정에 이르렀는데, 요즘 소위 빵셔틀이라고 하는 일들을 했었습니다. 중1때는 아직 학교에 급식시설이 마련되기 전이라 점심시간에 컵라면셔틀도 했죠. 그리고 힘센 친구들의 샌드백 노릇을 하며, 어떤 일진이 장난으로 캔에 자신의 오줌을 담아 저에게 마시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친구들에게 무시 안당하고 사는 일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것이 공부였습니다. 다행히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생에 있어 좋은 스승을 만나 공부에 머리가 잠시 트인 이후에 점점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전교에서 항상 10위권 이상 차지했었죠. 그래서 급우들의 괴롭힘이나 안 좋게 보는 인식이 많이 나아지기도 했었지만, 원래 중학교 때 일진이나 노는 애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국 여전히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집에서도 맘 편히 있지 못했습니다. 가정불화가 점점 더 심해져 갔죠. 가정형편이 여전히 나아지지 않아서, 어머니는, 솔직히 어머니를 욕하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 저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외할머니의 생활비를 가져가고, 외가식구들과도 돈 문제로 인해 많이 싸웠습니다. 특히 이모와는 친자매였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태어난 이후로는 말조차도 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모가 지금도 제일 무섭습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보던 화목한 가정은 일찌감치 안드로메다로 갔죠. 즉 집도 저의 쉼터가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어머니는 저와 함께 서울에 있는 친아버지란 사람을 찾아가 양육비를 얻으려고 했지만, 친아버지는 양육비를 한 푼도 내어 준 적이 없었고, 오히려 경찰을 불러 내쫓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친아버지도 그리 생활이 넉넉지 못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당시 그리고 지금도 친아버지 집은 상당히 부자라고 합니다. 용평리조트 주변의 거의 모든 땅이 친아버지 집안의 땅이고, 지금도 제 배다른 동생은 캐나다에 유학을 가있는 상태입니다. 삼촌은 아시안게임 스키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학창시절에 집과 학교 말고 머물 곳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근데 그 두 곳 어디에서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친아버지 집에서도 반겨주지 않았죠. 정말 어디 하나 쉴 곳이 없었지만, 그 시절에 저의 마음을 보살펴주었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사실 외가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싫었지만, 교회 친구들과 선생님은 저를 항상 따듯하게 대해주셨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 고마웠죠.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여전히 나의 친구로 있어 주었던 TV였습니다. 여전히 TV드라마나, 영화,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쉴 곳이 없었던 저에게 여전히 안락한 쉼터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그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강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고3때 연기자의 길을 결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애니가 너무 좋아서 성우가 꿈이었는데, 나중에 배우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게 과연 배우의 재능이 있는지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래서 재능을 확인할 만한 수단을 써보려고 했지만, 연기학원을 다니기엔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했고, 극단이나 다른 정보가 부족한 탓도 있었고, 또한 확실히 구체화된 것이 거의 고3중반쯤이라서,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연극영화과를 말씀드렸더니, 장난치지 말라며 들은체 만체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서울만 가면 지방보다는 연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어머니도 나를 꼭 서울로 보내려고 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둘의 생각이 맞아떨어져, 어떻게 다양한 방법을 찾다가 결국 서울의 D모 대학에 수시로 합격하였고, 어머니가 그때, 강원도 용평의 친할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친할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얻어내어 결국 서울로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서울에 D모 대학의 연극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도 그리 반대를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처음으로 하게 된 조그마한 단막극에서(1시간 좀 안 되는 분량일 겁니다.)어떻게 주인공을 맡게 됩니다. (근데 내용이 좀 아스트랄했죠. 공포스런 비극이었습니다.) 어쨌든 정말 첫 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아 기대도 컸고, 부담감도 컸습니다. 근데 처음에는 복식호흡이나 발음 이런거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처음이라 선배들에게 많이 지적받고 많이 혼나기도 했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연극 동아리 활동을 별로 반대하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제가 연습하느라 밤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학교공부를 못하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저의 연극동아리활동을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심하게는 빨리 안 들어오면 연습하는 곳까지 찾아와서 다 뒤집어버린다는 말에 정말 겁이 나더군요. 제가 혼나는 건 상관없지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욕먹고 피해 받는 건 더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동아리사람들에게 알리기도 어찌 보면 너무 창피해서 제가 일부러 맹장염에 걸렸다고 속이면서 까지 다른 사람보다 일찍 연습을 끝내고 나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인공이 이렇게 연습에 빠져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이 연습도 제대로 못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정말 그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공연 날이 다가왔습니다. 첫 공연이었죠. 몇 번 실수할 뻔 했지만 그래도 첫 공연을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연습 때는 그렇게 안 되던 대사나 감정 표정들이 공연을 하니까 어찌 그리 잘되던 지요. 총 3번의 공연을 했는데, 선배들도 저를 보며 공연 하면 할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다며, 은근히 무대체질이라고 자신감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좋았던 건 공연이 끝난 뒤에 사람들이 박수쳐줄 때의 그 희열감이 기가 막히더군요. 그동안 마음고생 몸 고생 하던 것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제 인생의 첫 연기도전을 나름 잘 끝내고, 저는 뭐 재능이나 끼는 둘째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주목해준다는 그 희열감의 추억이 강렬하게 내 마음속에 남게 되었고, 결국 정말 내가 연기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연극영화과로 다시 대학을 지원(반수)하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그때부터 저와 어머니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끼가 좀 있는 건 인정하지만 연극영화과에 다시 가는 것, 아니 연기자나 그런 연예관련 직업(소위 딴따라)이라고 하는 직업을 갖는 것 자체를 반대하셨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는 레코드가게를 하시기전 성우와 가수가 꿈이셔서 성우나 가수 지망생을 하시다가 포기하였었고, 예전에 흑석동에서 레코드가게 하실 시절에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많이 친하셔서(실제로 유인촌 장관님과도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그들의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쪽 일이 안되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 알고 계셨기에, 그렇게 반대하셨던 것입니다. 아예 그 길로 가느니 같이 죽자고 까지 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도 끝까지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대치상태에 이르다가 결국 어머니께서 항복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큰 싸움을 치르고 나니 때가 너무 늦어있었습니다. 이미 시간은 9월이 다되어갔고, 연기로 입시를 준비하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가 아닌 시나리오와 글쓰기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영화과에 지원하게 되어 마침내 서울에서 유명한 영화과중 하나인 장충동에 있는 D모 대학 영화과에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영화과 생활이 정말 좋았습니다. 비록 저는 연기자가 꿈이었지만, 영화과 사람들과 말도 잘 통하고 특이한 친구들이 많아서 신기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영화과에 가는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셔서 아직도 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저의 생활을 통제하셨죠. 그러니까 우리어머니의 스타일이 드라마로 치면 김탁구에 나왔던 전인화씨의 캐릭터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항상 자식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야만 사시는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영화과 친구들과 가까우면서도 아직 좀 멀게 느껴지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좋았죠. 그리고 1학년 영상제작수업시간에 몇 컷 안 되는 작은 영상에 잠시 연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CF같은 수준의 영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근데 수업시간에 기 작품을 시연하면서 그때 우리를 가르치셨던 교수님께서 연기가 아주 기가 막히다, 차태현 같다며, 칭찬을 해주셨죠. (그때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호로비츠를 위하여 라는 영화로 유명하신 권형진 감독님이십니다.) 그분이 그냥 예의상 해주신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은 좋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좋을 것 같던 영화과 생활도 점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연극영화과가 등록금이 정말 비싸다는 것은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 서울에서의 가정사정은 점점 더 안 좋아져서 결국에는 영화과를 다니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휴학하고 군대에 다녀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께서 또다시 저를 원치 않는 일로 끌어들이려 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그해 카투사를 지원하려고 토익을 준비하다가 목표 점수가 늦게 나와서 지원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어머니가 카투사에 혹하신 나머지 저에게 1년을 더 기다렸다가 카투사에 지원하라고 설득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육군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께서 이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라며, 애걸복걸하셔서 결국은 제가 어머니에게 이번 한번만 마지막으로 당신의 소원을 들어 줄테니 이제는 정말 내 인생을 더 이상 당신 맘대로 하지 말라고 어떻게 보면 차갑게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에 동의했고, 저는 그 대신 영화과에서 나와서 학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신문방송학과에서 1년을 더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전과를 한 것이죠.
그렇게 2010년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사실 저도 그래서 카투사를 가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탈락했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 극도로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정말 뭘 위해 살았는지 실망감이 밀려오더군요. 그리고 그 분노의 화살이 전부 어머니에게 돌려졌습니다. 이젠 신도 내편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고독감과 우울함에 빠졌습니다. 사실 이때까지 제 주변 환경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결국 부모를 이기려는 마음 없이, 또 그렇게 환경핑계를 대며 꿈을 꾸기만 하고 외부의 힘든 상황으로부터 좀 더 굳은 신념으로 버티려 하지 않았던 내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고 이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에 자살충동까지 느끼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빨리 군대를 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남자들에게 군대는 리셋의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군대를 계기로 내 과거의 모든 상처와 아픔, 그리고 부족했던 점들, 절망과 외로움을 모두 포맷하고 다녀와서 진정으로 내 꿈의 길로 향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치아교정중이고 하다 보니 정기외박이 주어지는 공군을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 또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인 서울 대학에 오는 수준이니 모집병인 공군에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합격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때마침 복학시즌과 겹치고, 군 생활이 줄어들면서 공군이 2년이 되니까 편하다는 인식이 생겼는지, 4:1, 5:1이라는 공군 사상초유의 지원율 폭등사태가 오게 되면서, 보기 좋게 공군을 두 번씩이나 탈락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근데 오늘까지 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나의 지금 이런 나약하고 상처 입은 모습을 피하기 위해 군대에 가려고 하는데 이러는 걸 보면, 결국 이제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너의 꿈 앞에, 운명 앞에 당당히 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오면서 그냥 연기자의 꿈은 접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만, 그 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그 꿈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 들지 않더군요. 점점 더 열망이 강해져가기만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쨌든 어찌 보면 한편의 소설 같은 제 과거였습니다. 이거 지어낸 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도 내 과거가 지어낸 소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연기자의 길을 다시 걸으려고 합니다.(어차피 공군은 제일 빠른 게 4월 입대이니 군대는 거의 물 건너 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연기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앞으로 갈 길을 잡아야 할 지 고민입니다. 저는 최종적으로는 무대배우보다는 영상연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루트를 고민 중입니다. 일단 연기학원은 고려하고는 있습니다만, 자금사정이 넉넉지 않아서, 뭔가 필름메이커스에서 독립영화나 학생영화를 통해 나름대로의 커리어(?)를 쌓고 싶습니다. 물론 외모나 이미지야 그 작품에 원하는 대로 맞추면 되는 문제입니다. 근데 이렇게 학생영화나 독립영화를 통해 연기자에 도전하려고 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지금 교정기를 착용중입니다. 그래서 제가 노력을 하려고 해도 카메라에 잡힐 수밖에 없겠죠, 불행히도 투명교정기도 아니고요. 그래서 두 번째로 생각하는 게 극단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대연기는 아무래도 교정문제가 덜할 것도 같고요.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저의 성격을 좀 바꾸기 위해 이벤트회사의 MC로 취직해서 어느정도 활동을 하다가 교정기가 풀리고 나면 다시 독립영화나 학생영화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벤트 MC라는게 생뚱맞지만 하다보면, 그래도 다른 직업보다는 저의 약간 소심해진성격을 고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적응 하는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리고 정 안되면 4월에 공군 다시 가야하는데, 이건 제 기분상의 문제지만, 제가 4월에 가서 제대하면 25세 4월인데, 그러면 배우의 길이 너무 늦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고요. 사실 전 성공하고 싶습니다, 이왕 이 길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물론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큽니다만, 솔직히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제가 선택한 길로 최대한 성공해서 앞으로 생길 미래의 제 가족들은 저와 같은 불행을 겪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뜨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이라도 빨리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와야 성공할 확률도 높고 실패하더라도 다른 길로 갈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았네요. 제가 앞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기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러분들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연기자의 고민이 아니라 인생고민과도 같다고 볼 수 있겠네요. 뼈아픈 이야기도 겸허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걱정 마세요.